드라군 작전과 남프랑스 상륙
1944년 8월 15일, 연합군의 남프랑스 상륙 작전인 '드라군 작전(Operation Dragoon)'이 개시되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연합군은 2,000명의 포로를 잡고 생트로페를 비롯한 6개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드라기냥, 르 뮈, 레자르크도 36시간 내에 함락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레쥐의 '레드 카멜(Red Chameau)' 해변만은 예외였습니다.
프레쥐의 치열한 저항
독일군은 프레쥐 해안에 장거리 포대를 구축하고 상륙을 저지했습니다. 제142연대(제36사단)는 예정보다 6시간 늦은 오후 2시에야 상륙을 시도했으나, 예비 포격에도 끄떡없는 견고한 참호와 기관총 진지 앞에 좌절했습니다. 상륙정은 독일군의 집중 포화에 격퇴당했고, 결국 연합군은 프레쥐를 포기하고 동쪽의 '그린 카멜(Green Chameau, 르 드라몽)'로 상륙지를 변경했습니다. 오후 3시 34분, 제142연대 상륙정들이 그린 카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141연대가 수 시간 전부터 교두보를 확보한 뒤였습니다.
프랑스 제1군 상륙과 툴롱·마르세유 탈환 임무
8월 16일 밤, 프랑스 제1군 7개 사단이 카발레르쉬르메르와 생트로페에 2차 상륙을 감행했습니다. 패치 장군은 프랑스의 국가적 명예를 위해 툴롱과 마르세유 해방이라는 특명을 프랑스군에 부여했습니다. 목표 달성 기한은 9월 24일이었으나, 드 라트르 드 타시니 장군은 '2주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장 왕(King Jean)'이라는 별명답게 그는 예정보다 27일이나 앞당겨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쌍둥이 항구를 향한 동시 공략
드 라트르는 두 항구를 동시에 포위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툴롱: 몬사베르 장군의 제3알제리사단이 북쪽과 북서쪽 고지에서, 기욤 장군의 제4모로코산악사단 소속 6,000명의 구미에(Goumiers)가 연계하여 공격.
- 마르세유: 제3알제리사단 분견대, 자유 프랑스군 제1사단, 수드르 장군의 제1기갑여단이 담당.
요새화된 두 항구의 방어력
두 항구는 8월 17일과 23일의 항공·함포 폭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각 항구마다 75mm~200mm 구경의 포 200여 문이 배치되어 있었고, 마르세유에 15,000명, 툴롱에 25,000명의 결사항전 의지를 가진 수비대가 주둔했습니다. 툴롱은 30개의 요새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마르세유는 이중 방어선과 콘크리트 엄폐호, 4개 주요 진입로의 장애물로 중무장하고 있었습니다.
툴롱 전투: 숨통 조이기 전술의 성공
드 라트르는 '목 조르기(strangulation)'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8월 21일, 알제리사단이 북쪽과 서쪽에서, 제2군단이 동쪽에서 툴롱을 포위했습니다. 22~23일 포위망이 좁혀지며 시가지로 진입한 프랑스군은 약 2,000명의 국내군(FFI)과 합류, 일주일간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내부의 보루들이 차례로 함락되었고, 8월 27일 밤 생망드리 반도에 고립된 1,800명의 독일군을 끝으로 툴롱 수비대는 항복했습니다. 오후 11시 45분, 하인리히 뤼프스 제독이 프로방스 연안 독일군 사령관 자격으로 공식 항복했습니다.
마르세유 전투: FFI의 돌진과 조기 항복
마르세유는 중무장 요새인 탓에 드 라트르는 외곽에서 포위한 뒤 진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3알제리사단 선봉이 고정 경계선에 닿자마자, 열광적인 FFI 부대들이 독일군을 몰아내며 시내로 난입했습니다. 몬사베르 장군과 800명의 병력은 한때 독일군에 포위되는 위기에 처했으나, 증원군이 도착하며 위기를 넘겼습니다. 프랑스군은 체계적으로 저항 거점을 소탕했고, 한스 셰퍼 장군은 전멸을 직감하고 8월 28일 새벽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전과와 손실
- 포로: 마르세유 약 37,000명, 툴롱 약 17,000명
- 프랑스군 전사상자: 툴롱 2,700명, 마르세유 4,000명 (독일군 손실은 이보다 훨씬 컸음)
론 계곡 추격전과 제19군 탈출
마르세유 함락으로 드라군 작전은 예정보다 한 달 앞당겨졌습니다. 8월 16일부터 미 제36사단이 론 계곡으로 퇴각하는 독일 제19군을 추격했습니다. 6일 후 몬텔리마르 북서쪽에서 포위망을 형성했으나, 제11기갑사단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포위망이 뚫리며 제19군 주력은 로리올, 랑그르 고원, 벨포르 갭을 통해 탈출했습니다. 9월 6일 프랑스군이 독일 후위부대 30km까지 접근했으나, 제19군은 간신히 틈을 빠져나가 제11기갑사단과 함께 도주했습니다.
남프랑스 해방과 양 날개 작전(오버로드)의 합류
주력 부대가 빠져나갔음에도 미 제36사단은 독일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포로 15,000명, 전차·포·차량 4,000대 파괴). 이후 칸-그르노블 축(동쪽)과 마르티그-몽텔리마르 축(서쪽)을 따라 진격했습니다. 그르노블(8월 23일), 니스(9월 1일), 리옹(9월 3일), 오탱(9월 9일)이 차례로 해방되었고, 자유 프랑스 제1사단은 치열한 전투 끝에 오탱을 점령한 뒤 9월 11일 디종을 우회했습니다. 독일군은 디종을 즉각 포기했습니다.
드라군과 오버로드의 역사적 만남
9월 12일 오전 9시경, 디종 북쪽 솜베르농(Sombernon) 지역에서 제1사단 선봉이 패튼 장군의 제3군 우익인 르클레르 장군의 제2기갑사단(2e DB) 수색대와 조우했습니다. 이로써 남진하는 '드라군' 부대와 북진하는 '오버로드' 부대가 만나 남북 집게 운동이 완성되었습니다. 사흘 뒤인 9월 15일, 드라군 부대는 제6군집단에 편입되어 아이젠하워 장군의 공식 지휘 하에 오버로드 작전 우익으로 통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