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4년 8월 17일 벌어진 스탈루페넨(Stallupönen)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겪게 될 참패를 예고하는 서곡이었다. 이 전투에서 헤르만 폰 프랑수아(Hermann von François) 장군이 지휘하는 압도적으로 열세인 독일군은 2개 사단에 불과한 병력으로 러시아 1개 야전군 전체를 저지시키고 굴욕적인 후퇴로 몰아넣었다.
전쟁 개시와 양측의 병력
1914년 8월 15일, 러시아와 독일은 이미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파벨 렌넨캄프프(Pavel Rennenkampf) 장군 휘하의 러시아 제1야전군은 독일 영토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6개 정예 보병사단과 5개 기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 보병은 3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제10군단(제28·29보병사단), 중앙에는 제3군단(제25·27보병사단), 남쪽에는 제4군단(제40·30보병사단)이 배치되었다. 러시아 진형의 좌익은 기병사단 1개와 보병여단 1개가 엄호했고, 나머지 기병사단 4개는 제10군단 북방에서 작전했다.
104개 대대와 약 60개 중대 규모의 이 거대한 병력과 맞서야 했던 것은 프랑스계 출신 장군 헤르만 폰 프랑수아가 지휘하는 독일 제1군단 하나뿐이었다. 제1군단은 단 2개 보병사단(24개 대대), 기병중대 8개, 기관총중대 8개(48정)만을 보유했다. 포병은 야포 144문과 곡사포 16문이 전부였다. 결국 러시아군은 보병에서 4:1, 기병에서 거의 8:1의 수적 우위를 점했고, 포병 역시 우세했다.
러시아군의 공격
동프로이센 방어를 총괄하던 독일 제8군 사령관 폰 프리트비츠(von Prittwitz) 장군은 프랑수아에게 국경 지대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더 서쪽의 안거라프(Angerapp) 강선까지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1보병사단을 스탈루페넨에 배치하고 제2보병사단은 더 남쪽으로 넓게 펼쳐 로민데(Rominde) 소택지 일대의 광대한 지역을 담당하게 했다. 새벽부터 러시아 보병 3개 군단이 독일 영토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전혀 협조되지 않았다. 중앙의 제3군단이 다른 부대보다 빠르게 전진하여 스탈루페넨에서 독일 제1보병사단과 교전에 돌입했다.
러시아 제27보병사단은 스탈루페넨 남동쪽 고리텐(Goriten)에서 독일 제2보병사단 산하 4개 대대를 압박했다. 프랑수아는 즉시 전선의 가장 취약한 지점으로 달려갔다. 러시아 제3군단의 남익은 이론상 제4군단이 엄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3군단의 제27사단과 제4군단의 제40사단은 협조에 실패했고, 두 부대 사이에 폭 10km가 넘는 거대한 간격이 생겨버렸다.
독일군의 반격
고리텐으로 향하던 프랑수아는 자신의 제2보병사단장 폰 팔크(von Falk) 중장이 지휘하는 연대급 병력이 '포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목격했다. 실제로 팔크는 사단 주력과 함께 남쪽에 있다가 전투 소음을 듣고 3개 대대 이상을 이끌고, 고리텐에서 싸우고 있던 자기 사단의 나머지 4개 대대와 합류하러 이동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팔크는 러시아 진형의 간격을 발견하고 즉시 노출된 러시아 제27보병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동시에 프랑수아도 전장에 도착해 지휘를 인수했다. 독일군은 즉각 공격에 나섰다. 러시아군이 팔크의 반격 병력의 5배에 달했음에도 독일군의 기습 공격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러시아군은 배후에서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중대 단위로 항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지점에서만 약 3,000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도망치는 러시아군이 눈에 보였습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였습니다."라고 프랑수아는 회술했다.
물론 더 북쪽에서는 러시아군의 수적 우세로 인해 독일군이 다소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러시아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결국 제27보병사단의 궤멸로 러시아군은 전체적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러시아군의 손실은 8,000명을 넘었던 반면, 독일군의 총 손실은 약 1,300명에 불과했다. 이것은 대군(大軍)을 이긴 이성의 전술적 승리였다.

헤르만 폰 프랑수아 장군. 그의 프랑스 위그노 조상들은 1695년 프로이센으로 이주했다.

스탈루페넨 전투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