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반응을 잘못 읽은 그리스 공산당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스 공산당(K.K.E.) 지도부가 범한 가장 큰 판단 착오는 외국 세력의 반응을 오해한 것이었다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이들은 처칠과 스탈린 사이에 맺어진 밀약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으며, 모스크바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개입해 줄 것이라 기대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영국이 무력을 동원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그리스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주로 아테네에 집결한 영국군과 맞서 싸울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자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테네 봉기와 놓쳐버린 기회
티토가 이들을 부추겼다는 데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들이 아테네를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12월 3일 헌법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나 봉기의 신호가 울리기 이틀 전부터 이미 E.L.A.S.(그리스 인민해방군) 병력이 수도로 집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만 공산당의 판단이 완전히 빗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12월 5일 영국 하원 토론회에서 영국의 그리스 개입은 노동당 의원들과 외무성, 그리고 일부 영국 언론인들의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공산당은 초기 전술적 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런던이 증원군을 파견할 시간을 스스로 벌어주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성탄절에 처칠과 이든이 아테네를 방문해 K.K.E. 지도부와 회담하면서 여론마저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처칠이 "루스벨트 대통령과 스탈린 원수 역시 자신의 아테네 방문을 알고 있으며 승인했다"고 경고했음에도, K.K.E. 지도부는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영국이든 그 후원 세력이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내놓았다. 아마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소련의 침묵과 처칠의 정치적 타협
당시 소련은 그리스에서 최후 대결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12월 30일 아테네 정부에 소련 대사가 임명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K.K.E. 지도부는 더 이상 모스크바가 자신들의 봉기를 불승인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조차 감출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처칠은 정치 세력 간 화합을 위해 직접 손을 나섰다. 그는 국왕이 그리스로 귀환하기 전에 반드시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12월 31일에는 아테네 대주교 디미트리오스 다마스키노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사임하여, 공화파 성향으로 오랫동안 이름난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장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바르키자 협정으로 끝난 봉기
공산당은 1945년 1월 11일까지 저항을 이어갔다. 그날 입은 군사적 패배는 스코비 장군에게 휴전을 요청하는 것 외에 남은 길이 없음을 확인해 주었다. 한 달 뒤, 아테네 교외 바르키자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는 정치범죄 혐의로 기소된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사면, 군주제 문제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 약속, 그리고 여러 일반 개혁 조치가 포함되었다. 그 대가로 E.L.A.S.는 무기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