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그리스 내전의 도화선: 1944년, 화약고가 된 아테네

독일군 철수와 공산 쿠데타의 그림자

독일 점령군은 1944년 9월부터 그리스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이 떠나는 즉시 공산주의 세력이 쿠데타를 통해 국가를 장악할 것이라는 위협은, 그리스 정세를 주시해 온 대다수 관찰자에게 이미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카세르타 협정과 숨겨진 거래

같은 달,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는 나폴리 인근 카세르타에서 좌익 계열의 E.L.A.S.(그리스 인민해방군)와 우익 계열의 E.D.E.S. 군사 지도자들을 만났고, 이들은 각지의 유격 부대를 그리스 정부의 권한 아래 두는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곧바로 이 부대들의 지휘권을 로널드 스코비 장군에게 넘겼습니다. 파판드레우는 스코비와 사전에 '그리스가 E.L.A.S.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겠다'는 비밀 합의를 맺어둔 상태였습니다.

처칠-스탈린 회담, 반쪽 종이에 그려진 그리스의 운명

10월 9일, 윈스턴 처칠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회담을 가졌습니다. 처칠 자신이 저서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회고했듯이, "수백만 사람의 비극적인 문제가 겉보기에는 가볍게 처리되었습니다." 그리스와 관련해서는, 스탈린이 처칠이 탁자 건너로 건넨 반쪽짜리 종이에 굵은 선을 그어 지운 행위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는 소련이 적어도 당분간은 발칸반도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이었고, 곧 K.K.E.(그리스 공산당) 동지들에게 등을 돌리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영국군의 호위 속 아테네 입성, 그러나 짧았던 통합

그리스를 덮치려는 공산주의 위협 앞에서, 그리고 스탈린이 이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손을 내려준 상황에서 처칠은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1944년 10월 18일, 파판드레우의 국민통합정부가 아테네에 입성할 때 완무장한 영국 사단이 이를 호위했습니다. 이 정부에는 민족해방전선(E.A.M.) 소속 대표 여섯 명도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민통합정부는 오랫동안 '통합'된 채로 있지 못했습니다. 10월 18일부터 그리스 내전 제2기의 시작점인 12월 3일까지 벌어진 사건들의 정확한 경위를 재구성하기란 어렵습니다. 많은 결정이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분열된 지도부와 폭발의 순간

한동안 K.K.E. 지도부는 두 갈래 노선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존 정부와 국가 기구 안으로 평화롭게 침투하려는 온건파였고, 다른 하나는 공개적인 무력 투쟁을 추구하는 강경파였습니다.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시안토스는 처음에는 전자, 즉 평화적 침투 노선의 지지자였습니다. 그러나 11월 27일 저녁, K.K.E. 중앙위원회의 또 다른 강력한 인물인 얀니스 이오니디스와의 회동을 마친 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12월 10일 공포된 공산 유격 부대 해산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에 따르면 E.L.A.S.는 새로 창설되는 국군에 편입되는 단 하나의 여단 규모로 축소될 예정이었습니다. K.K.E. 지도부는 처음에는 이에 동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승낙을 철회하고 말았습니다. 긴장이 고조된 아테네는 이내 본격적인 내전의 전장으로 변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