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그리스 왕정 복위 국민투표, 공산주의에 맞선 '최고의 보장'

바르키차 협정, 새로운 격랑의 시작

바르키차 협정은 그리스 정치 분쟁의 한 장을 닫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격동적인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갈등의 초점은 즉시 국가가 채택할 정부 형태를 둘러싼 논쟁으로 옮겨갔다.

1946년 총선과 왕정파의 압승

1946년 3월 31일 총선이 실시되었을 때, 공산당과 이에 동조하는 정당들은 선거를 보이콧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스 칼다리스가 이끄는 인민주의(왕정파) 정당이 전체 유효표의 60%를 득표하며 의회 354석 중 23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칼다리스는 같은 해 4월 정무에 취임했다.

실망 속에 자라난 좌익 지지 심리

12월 봉기 당시 공산주의 세력은 다수의 인질을 납치해 북방으로 끌고 갔으며, 이러한 행위와 저지른 수많은 만행 탓에 민족해방전선(E.A.M.) 회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그리스 사회에는 깊은 좌절감이 만연했다. 공동의 적과 싸우던 항전의 세월 동안 '사회적·정치적 재생'이라는 희망이 태어났지만, 해방 후에도 몇 달이 지나도록 그 희망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곧 그리스가 메탁사스 독재 이전의 정치적 음모와 파벌 싸움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마저 부흥에 대한 갈망에 이끌려 그들에게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E.A.M.의 재기와 소련의 외교 공세

1945년 1월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E.A.M.은 권력 장악의 가능성을 엿보았으며, 모스크바의 새로운 태도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번에는 사태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1946년 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처음으로 회의를 개최했고, 소련 정부는 그리스 주둔 영국군의 철수를 요청하는 한편, 3월에 그리스에서 실시될 선거에 대한 국제 감시 활동 참여를 거부했다.

국민투표로 결정된 왕정 복귀

1946년 5월, 그리스 북부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는데, 이는 공산 세력의 세 번째 권력 장악 시도를 예고하는 서곡이었다. 이듬해인 9월 1일, 칼다리스 정부는 약속했던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유권자의 70%가 국왕의 귀환에 찬성표를 던졌다.
국왕의 인기는 전쟁 중 최저점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급상승했다. 그리스 국민은 왕정こそ가 공산주의 체제 수립을 막아서는 '최고의 보장'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