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의 시작: 기습과 제해권 장악
1904년 2월 8일 밤부터 9일 새벽 사이, 일본 함대는 선전포고 없이 여순항(포트아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적함 7척을 어뢰로 파손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순식간에 제해권을 손에 넣었고, 이듬해 일본의 승리로 끝나는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분쟁의 배경: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
이 전쟁은 북태평양 지역, 구체적으로 만주와 중국에서 벌어졌습니다. 이곳은 영국, 미국, 프랑스가 경제적 입지를 확보하려 다투던 땅이었지만, 무엇보다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이 시작된 이래 일본과 러시아가 오랫동안 경쟁해 온 지역이었습니다. 분쟁의 직접적 원인은 러시아의 공격적인 남하 정책이었습니다.
삼국간섭과 러시아의 남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을 통해 리아오둥(요동) 반도를 할양받는 한편, 타이완(포르모사)과 펑후 제도를 획득하고 중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프랑스와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은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강행하면서 일본은 리아오둥 반도 반환을 강요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러시아의 경제적 침투와 군사적 확장
1896년 러시아는 중국과 비밀협정을 맺어 중국 영토를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하얼빈에서 바다까지 만주를 가로지르는 철도 부설권을 얻어내며 동중국에서의 경제적 침투와 영향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1897년 두 명의 독일 선교사 살해 사건으로 독일이 교주만을 99년 조차로 확보하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여순항을 포함한 리아오둥 반도 남부에 대한 25년 조차를 요구했고, 1898년 중국은 해군기지 설치권을 포함한 여순항 조차를 러시아에 허락했습니다.
1900년 외세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이 8개 강대국의 군사 개입으로 진압된 뒤에도, 러시아군은 '둥칭 철도' 건설 지원을 명분으로 만주에 계속 주둔했습니다. 동시에 러시아 모험 사업가들은 만주 압록강 유역의 삼림 채벌권 사업을 추진하여 러시아 신민들이 한국으로 진입할 발판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문명화의 사명을 지녔다고 믿으며 이 계획에 열광했고, 일본의 힘과 야망을 크게 과소평가했습니다.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던 재무상 비테(Witte)는 사임을 강요당했습니다.
교섭의 결렬과 전쟁 개시
처음에 일본은 협상으로 문제를 풀려 했습니다. 만주 북부는 러시아에, 만주 남부와 한국은 일본에 귀속시키는 분할 안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지도부는 곧 타협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군사 개입을 결정했습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군사적으로 잘 준비되고 조직적인 상태였으며, 영국과 동맹을 맺어 외교적 지원을 받는 데 더해 자국 기지 인근에서 싸울 수 있는 유리함도 있었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극동 사령관 알렉시예프 제독과 쿠로파트킨 장군이 이끄는 지휘부는 무능했고 병력도 부족했습니다. 증원 부대는 단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열악한 수송 능력과 바이칼호 구간의 단절로 인해 제대로 파견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국내 불만의 물결로 정권 자체가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승승장구: 요양·사허·봉천 회전과 쓰시마 해전
이러한 역학 관계는 일본 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러시아군은 요양 회전(1904년 8월 24일~9월 5일), 사허강 회전(1904년 10월 5일~18일), 봉천(무크덴) 회전(1905년 2월 21일~3월 10일)에서 연달아 패배하여 만주 북부로 밀려났습니다. 1905년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발트해에서 힘겹게 먼 원정을 완수해 여순을 구원하려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함대는 쓰시마 해전에서 궤멸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포츠머스 평화조약: 서구 열강의 굴욕
양국 정부는 휴전을 체결했습니다. 러시아가 1905년 혁명으로 크게 약화되어 있었지만, 일본의 재정 역시 완전히 소진되어 극동의 러시아 주력군을 궤멸시킬 여력이 없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으며, 이때 체결된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 이익의 우월성을 인정한다.
- 러시아는 리아오둥 반도 조차권, 여순항 기지, 창춘 이남 철도, 사할린 섬 남부 절반을 승전국 일본에 양도한다.
- 양국은 상호 합의에 따라 만주를 중국에 반환한다.
- 일본의 강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쟁 배상금은 지급되지 않는다.
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좌절과 일본의 영광
이 전쟁은 패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러시아 정부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초기 패전의 굴욕은 어차피 언젠가 일어났을 1905년 1월 혁명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면 일본에게 이 전쟁은 진정한 승리였습니다.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서구 열강이 아시아 국가에게 패배한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은 이를 통해 상당한 군사적 위상을 얻었고, 그 위상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전쟁과 혁명: 1905년 러시아 혁명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충돌하는 동시에, 1905년 1월 혁명의 발발로 내부적으로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 혁명은 경제적 원인, 학생들의 불만,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민주당(S.D.)과 사회혁명당(S.R.)으로 구성된 조직적 야세력의 등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혁명은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폭발했으며,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진압 과정에서 13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운동은 확산되어 군부에까지 번졌는데, 그 여름 흑해에서 일어난 전함 포템킨 호의 반란이 대표적입니다. 반동 세력이 승리를 거둔 것은 다음 해 초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전간기: 중국 북부로의 진출
1919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구 독일령 태평양 도서 대부분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 회의(1921년)는 일본에 산둥을 중국에 반환하고, 시베리아에서 철병하며, 함대를 제한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국경 분쟁을 빌미로 봉천(무크덴)을 점령(1931년 9월 18일)한 뒤 만주 전역을 장악했고, 1932년 이 지역은 일본의 보호국인 독립국 '만주국(만주코쿠)'이 되었습니다. 1933년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고, 1937년에는 중국 본토의 일부를 점령하며 전쟁을 확대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히로시마 참화까지
1936년 방공협정에 가담한 일본은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이어 1941년 12월 7일, 도조 장군은 미국에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주둔한 미국 함대의 파괴를 명령했습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필리핀, 홍콩, 말레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가 차례로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진격을 저지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은 잃었던 지역을 하나씩 되찾았고, 마침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8월 14일 일본은 항복했으며, 그 결과 일본은 19세기의 국경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