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대 개요
- 소속: 육군 – 식민지군(현 해병대)
- 유형: 사단
- 모토: "언제나, 어디서나(Toujours et partout)"
창설 배경
제9식민지보병사단(9e DIC)은 1943년 7월 15일 북아프리카에서 창설되었다. 프랑스 서아프리카(A.O.F.)에서 온 식민지 부대와 모로코·알제리에 주둔하던 부대들을 기반으로 편성되었으며,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에 도달한 프랑스 본토 출신 탈출자들도 이 부대에 합류했다. 당시 제9DIC는 프랑스 서아프리카 전역 출신 아프리카인 병사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었다.
지휘관
- 1943년 7월 15일 ~ : 마냥(Magnan) 장군
제2차 세계대전기 편성
- 제4세네갈 저격병 연대(4e RTS)
- 제6세네갈 저격병 연대(6e RTS)
- 제13세네갈 저격병 연대(13e RTS)
- 모로코 식민지 보병연대(RICM)
- 모로코 식민지 포병연대
이 외에도 대공포 부대, 공병, 사단 수송대, 군수·위생 부대, 통신 부대가 사단에 배속되어 하나의 완결된 전투 단위를 이루었다.
1944년: 엘바섬 점령과 프로방스 상륙
엘바섬 작전
1944년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사단은 코르시카로 이동한 뒤, 마냥 장군의 지휘 아래 단 넉 날 만에 엘바섬을 점령하는 기록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프로방스 상륙
8월 16일~17일, 사단은 아작시오에서 출항하여 같은 날 카발레르만 해안에 상륙을 시작했고, 드라트르(de Lattre)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제1군에 배속되었다.
8월 20일, 가장 먼저 상륙한 제6RTS와 RICM 병력은 코만도 부대와 전차 부대의 증원을 받아 툴롱 방면으로 진격했다. 다음 날 솔리에빌(Solliès-Ville), 쿠동(Coudon), 파를레드(Farlède)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툴롱 공방전
8월 22일~23일에는 발레트(La Valette) 확보를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완강히 참호를 구축한 적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혔으나, 사단은 다음 날 발레트를 점령했고 RICM 병력은 툴롱 시내로 진입했다.
8월 24일부터 27일까지 툴롱 공략전이 본격화되었다. 동쪽에서는 제6RTS와 전차 부대가 도시를 공격했고, 아르티그(Fort d'Artigues) 요새를 두고 격전이 벌어졌다. 사단 포병은 요새에서 불과 수백 미터 앞까지 전진해 거대한 돌파구를 열었고, 이는 곧 적의 항복으로 이어졌다. 북쪽과 서쪽에서는 제4RTS가 제3알제리보병사단(3e DIA) 부대와 교대한 뒤 발부르덴 지구와 아렌느 지역을 돌파했다. 방어의 핵심은 요새들이었는데, 생트카트린 요새와 라마그(Lamague) 요새가 8월 25일 가장 먼저 함락되었다. 특히 라마그 요새에서는 사단 포병의 집중 포격 이후 제4RTS 제3대대가 아무 손실 없이 수백 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말부스케(Malbousquet) 요새는 격렬한 저항 끝에 26일 함락되었다. 이어진 시가전에서 조병창과 도심이 점차 해방되었고, 무리용(Mourillon) 지구의 라미트(La Mitre)와 생망드리에(Saint-Mandrier)의 저항점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8월 26일에는 라미트 저항점, 씨푸르(Six-Fours) 요새, 시지(Sicié) 반도의 진지가 차례로 항복했다. 다음 날에는 생망드리에 반도가 사단 포병과 미군 중포병의 화력, 그리고 연합군 함정의 함포 사격에 압도되어 함락되었고, 이로써 툴롱 정복이 완료되었다. 함락 전날 사단은 육군장관과 해군장관, 프랑스군 사령관 드라트르 드 타시니(de Lattre de Tassigny) 장군이 참석한 가운데 시내 행진을 실시했다.
프랑스 본토에서 벌인 첫 일련의 작전에서 사단은 포로 1만 명과 막대한 장비를 노획했으며, 적 사망자는 1천 명을 넘어섰다.
9월: 론 계곡을 따라 북상
재편성을 마치자마자 사단은 즉시 진격을 재개했다. 첫 도약으로 부아론(Voiron) 지역에 도달했고, 이후 폰타를리에(Pontarlier)와 로몽(Lomont) 방면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휘발유 부족으로 이동이 지연되거나 때로는 중단되기도 했다. 가장 앞선 RICM 부대는 식민지 대전차포 연대와 합류해 이미 두(Doubs) 강 유역에서 적과 접촉을 재개한 상태였다. 후속 부대들은 9월 25일~26일에야 두강 만곡부의 주력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전선이 안정되자 9월 27일 사단은 방어선을 확장해 우익의 제3DIA가 담당하던 스위스 국경까지의 구역을 인수했다. 또한 그랑드샤르트뢰즈(Grande-Chartreuse) 대대를 비롯한 F.F.I.(프랑스 국내군) 2개 대대의 증원을 받았으며, 이 부대는 이후 프랑슈콩테(Franche-Comté) 대대와 클뤼니(Cluny) 대대로 교체되었다.
'블랑시망': 사단의 현지 재편성
이후 사단의 일상은 한 구역을 담당하는 대부대의 전형적인 삶이 되었다. 국지적 작전, 순찰 활동, 포병 교전, 양측의 소란 사격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계절이 깊어지며 추위와 비가 이어지자 세네갈 저격병들을 교체하는 일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대부대를 후방으로 철수시켜 예비대로 전환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감당할 수 없는 사치였다. 결국 사단은 현지에서 재편성, 즉 '블랑시망(blanchiment)'을 단행하여 식민지군의 명성에 끌려 지원한 신규 입대자들을 편입했다.
군사 훈련조차 받지 못한 이 젊은 신병들과 함께 제9DIC는 전역을 계속했고, 훈련은 전선에서 상황과 부대 생활에 맞춰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신병들의 의지와 간부들의 역량이 훈련의 부족함을 메웠다. 이 과정에서 제6, 제21, 제23식민지보병연대가 제6, 제4, 제13세네갈 저격병 연대를 계승하며,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선배들이 빛냈던 '식민지' 연대의 명예로운 번호를 이어받았다.
벨포르 돌파구와 뮬루즈 해방
겨울이라 해서 작전이 멈춰서는 안 됐다. 연합군이 전 전선에서 추진하는 공세를 지원해야 했다. 11월 초부터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보주(Vosges) 산맥이 프랑스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자, 프랑스군은 벨포르(Belfort) 돌파구를 통해 돌파를 시도했다. 사단의 정찰연대는 라인 강에 도달했고, 11월 말에는 사단 전체가 뮬루즈(Mulhouse) 해방에 참여했다. 이후 전선은 이 구역에서 1945년 1월 20일까지 안정세를 유지했으며, 그날 프랑스 제1군이 콜마르 포위권(Colmar Pocket) 섬멸을 위한 공세를 재개했다. 제9DIC는 이 공세에서 뮬루즈 북쪽의 근로자 주거 지역들을 막중한 희생을 치르며 점령해냈다.
독일 진공
이 전투들을 마친 제9DIC는 알자스 북부의 로터부르(Lauterbourg)로 이동한 뒤, 1945년 4월 2일 라인 강을 도하했다. 마침내 독일 영토에 진입한 사단은 카를스루에(Karlsruhe, 4월 4일), 라슈타트(Rastatt), 바덴바덴(Baden-Baden) 점령에 참여했으며,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방면으로 제1군단의 진로를 열어주는 성과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