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푸른 사단(Blue Division): 제2제국 시대 프랑스 해병대의 전설

푸른 사단의 창설 배경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 창설된 '푸른 사단(Blue Division)'은 해병대 역사상 처음으로 해병 보병 부대인 '마르수앵(marsouins)'과 해병 포병 부대인 '비고르(bigors)'를 하나의 사단 아래 통합한 해군 보병 사단이다. 사단은 행진용 보병 연대 4개와 포병 연대 1개로 구성되었다.

사단 편성

드 바수아즈(de Vassoigne) 장군의 지휘 아래 푸른 사단은 두 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 제1여단(레불 장군 지휘): 셰르부르 출신 제1해병보병연대와 툴롱 출신 제4해병보병연대로 구성
  • 제2여단(마르탕 데 팔리에르 장군 지휘): 브레스트 출신 제2해병보병연대와 로슈포르 출신 제3해병보병연대로 구성되며, 로리앙 출신 제1해병포병연대가 3개 포병대를 제공

세당 전투로 향하는 길

푸른 사단은 르브룅 장군이 지휘하는 제12군단 소속이었으며, 드 빔프팽 장군과 함께 마지막 반격을 시도한 뒤 세당 요새에 가장 늦게 진입한 부대이기도 했다.

  • 1870년 8월, 프랑스 동부는 세 개의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메츠에 포위된 바젠 원수를 구출하기 위해 맥마흔은 '샬롱군'이라 불리는 군대를 조직했고, 푸른 사단의 제2여단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랭스를 출발해 6일간의 강행군 끝에 세당에 도착한 제2여단은, 메츠로 재진군하기 전 군대를 정비·보급하고자 한 맥마흔의 계획에 따라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보몽 전투 이후 샬롱군은 세당에 고립되고 말았다.
  • 제2여단은 세당 요새 동쪽 측면에 위치한 바젠유 마을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8월 31일부터 프랑스군 전체가 무즈 강 우안으로 이동했지만, 르미의 철교가 아직 온전히 남아 있어 바이에른 선봉대 일부가 침투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야간까지 격퇴되었다.
  • 적의 병력·포병 우위는 막대한 손실을 낳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마을은 함락되었다가 다시 탈환되었고, 프랑스군은 북쪽 경계선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저물 무렵 증원으로 도착한 제1여단 덕분에 해 질 녘에는 바젠유 전역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9월 1일의 결사적 저항

9월 1일, 밤새 증원된 바이에른군은 새벽과 함께 마을을 공격했다. 그들은 마을이 비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단 참모차장 랑베르 소령이 조직한 150명의 해병 보병 반격에 부딪혀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후 두 차례의 뜻밖의 급변이 이어졌다.

  • 첫 번째 변화: 부상당한 맥마흔을 대신해 지휘권을 넘겨받은 드크로 장군이 확보한 진지의 포기를 명령했다.
  • 두 번째 변화: 바젠유가 철수한 직후 도착한 드 빔프팽 장군이 이 결정과 정반대 입장을 취하며 철수한 진지의 재점령을 명령했다.

10배에 달하는 적, 그리고 화력이 날로 강화되는 바이에른 제1군단과의 연이은 전투 끝에, 드 바수아즈 장군은 "해병대는 임무의 극한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부대의 완전한 궤멸을 피하기 위해 후퇴를 명령했다.

전투의 결과와 역사적 유산

푸른 사단은 이 단일 전투에서 2,655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무기와 병력 모두에서 우위에 있던 적에게 최소 두 배의 손실을 안겼다. 바젠유 주민 40명이 8월 31일과 9월 1일의 전투 중 목숨을 잃었고, 이후 6개월간 부상으로 인해 150명이 더 사망했다. 한편 적군은 200명이 넘는 장교를 포함해 7,000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 전투는 군사 역사에 기억되고 있다. 특히 화가 알퐁스 드 뇌빌은 부르주리 여관의 방어전을 그려 이 순간을 영원히 기념했는데, 그림 속에는 극도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 탄약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그 집을 사수하던 랑베르 소령과 소수의 병사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바젠유는 이후 오늘날까지 프랑스 해병대의 성지이자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