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유진 길버트 – 항공 역사상 최초의 에이스였는가?

세계 최초의 에이스는 누구인가?

확인된 격추 5기를 달성해야만 '세계 최초의 에이스'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광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확정하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다. 어떤 자료는 페구(Pégoud)를, 또 어떤 자료는 가로스(Garros)를 첫 번째 에이스로 꼽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유진 길버트(Eugène Gilbert) 역시 그 영예에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엄격하지 못했던 규정 때문에 공식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먼저 필수적인 5승을 거두었다. 문제는 그 시절 적기가 아군 진영 안쪽에 추락해야만 공식 승리로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길버트가 격추한 기체 중 3대는 운 나쁘게도 적진 쪽에 떨어졌고, 목격자들의 보고가 있었음에도 프랑스 육군 참모부는 이를 공식 전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더욱이 길버트에게 귀속된 승리 중 4건은 사실 관측수가 거둔 것이었다. 당시 기체에 실린 유일한 무기는 소총 하나뿐이었는데, 조종사와 '사수' 모두 승리의 공을 함께 받았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지극히 합당한 조치다.

단 한 번의 규정 수정, 단 한 걸음의 배려가 있었다면... 유진 길버트는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에이스가 되었을 것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기계에 빠진 소년, 조종사가 되다

유진 길버트는 1889년 7월 19일 프랑스 리옹(Riom)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계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그는 16세에 앞서가던 학업을 포기하고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의 작은 정비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직접 비행기를 제작하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10년 에탕프(Etampes)의 블레리오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단 8회의 교육과 총 1시간 30분의 비행 만에 조종 자격증(240번)을 따냈다.

징집된 그는 1911년 11월 항공 상병으로 임명되었지만, 같은 달 24일 심각한 사고를 당해 6개월간 요양해야 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여러 비행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포메리 컵, 베네트 컵, 미슐랭 컵 등에서 특히 활약했다.

전선으로 복귀하다

동원령이 내려지자 길버트는 다시 군 항공대로 복귀하여 베르네트(Vergnette) 대위가 지휘하는 MS 23 비행대에 배속되었다. 르 르베랑(Le Révérend), 팽사르(Pinsard), 그리고 롤랑 가로스 같은 당대 최고의 이름들이 그의 부대 동료였다. 부대는 처음 에피날(Épinal)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베르됭과 아미앙으로 이동했다.

'복수자' 호와 첫 전투

얼마 후 길버트는 벨포르(Belfort)에 주둔하는 MS 49 비행대로 옮겨 모란 N(Morane N)을 배정받았는데, 바로 전쟁 전 롤랑 가로스가 시험 비행했던 원형 기체와 같은 형식이었다. 며칠 전 포로가 된 친구와 MS 23에서 전사한 푸르프르(Pourpre)를 기리기 위해 그는 자신의 기체에 '르 방죄르(Le Vengeur, 복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5월 23일, 길버트는 무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기체로 아비아틱(Aviatik)과 교전했다. 조종간을 무릎 사이에 고정한 채 몸을 일으켜 소총을 쏘아야 했던 그와 달리, 독일기의 관측수는 훨씬 여유롭게 사격을 조준할 수 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날개 뼈대가 부러지고 방향타가 찢어진 모란기는 간신히 착륙했고, 동체에는 26발의 탄흔이 새겨져 있었다.

공식 인정받지 못한 승리들

6월 7일, 수리를 마친 길버트는 적진 안쪽에서 추락한 아비아틱 1기를 신고했고, 11일에는 두 번째 전과를 추가했다. 6월 17일에는 가로스가 고안한 프로펠러 보호용 디플렉터(deflector) 덕분에 기관총으로 독일기를 집중 사격해 추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곤경에 처한 프랑스기를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토우베(Taube)와 마주쳤다. 베르네트 대위가 카빈총으로 독일기를 격추했지만, 불운하게도 토우베는 적진 안쪽에 떨어졌다. 막 생명을 구해 준 승무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이 승리 역시 공식 인정받지 못했다.

11월 18일, 길버트는 정비사 베일(Bayle)과 함께 랭스(Reims) 근교에서 35분 넘게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아비아틱 1기를 아군 진영 쪽으로 격추하는 데 성공했다.

1915년 1월 10일에는 퓌슈르돈(Puechredon) 중위와 함께 룸플러(Rumpler)를 격추했는데, 이번에는 적기가 아군 쪽에 추락했다. 퓌슈르돈 중위는 겨우 15미터 거리에서 단 4발을 쏘아 관측수를 사살하고 조종사에게 부상을 입히며 라디에이터를 파손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조프르(Joffre) 장군은 '매일 공중전을 추구하는 조종사와 관측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스위스 억류와 탈출

4월 20일, 길버트는 바이예르(Weiller) 근처의 생타망(Saint-Amarin)으로 전근되었다. 6월 27일에는 홀로 모란 N에 올라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richshafen)의 체펠린 격납고 위로 90mm 폭탄 8발을 투하했다. 그러나 뜻밖의 고장으로 스위스에 불시착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곳에서 억류되었다.

8월 22일 탈출에 성했지만 기쁨도 잠시, 프랑스 정부가 보낸 '탈출 서약 파기 허가' 서한이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스위스 당국의 항의로 국경 밖으로 되돌려졌다. 한 번 더 시도 끝에 그는 1916년 5월 25일에야 완전한 탈출에 성공했다.

비극적 최후

그러나 길버트에게 공중전의 시간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는 르론(Le Rhône) 엔진을 장착한 신형기 인수 업무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1918년 8월 17일, 루틴 시험 비행 중 급강하하던 기체의 수평미익(안정판)이 부서지면서 유진 길버트는 생을 마감했다.

C.-J.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