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기록
확인된 격추 11기, 불확실 3기
생애

가브리엘 고티에는 1938년 공군사관학교를 소위 계급으로 졸업했다. 1972년 12월, 공군 대장이자 공군참모총장 계급으로 군 생활을 마감하기까지 두 날짜 사이에는 약 6,000시간의 비행 기록(이중 전시 500시간), 13회의 표창, 그리고 11기의 확정 격추와 3기의 불확실 격추가 있었다. 리옹 출신 외과의사의 아들로 1916년 9월 12일 태어난 그는 로미이에서 전투비행단 G.C.에 합류했다.

'이상한 전쟁(가짜 전쟁)'이 시작될 때, 그는 뤽스외유에 주둔한 부대와 함께 출격했다. 11월 22일, 세 대의 모란기와 편대 비행을 하던 중 모스발트 상공에서 4.(F)/121 소속 Do.17P 정찰기 1대를 요격해 격추시켰다. 한 달 후, 메서슈미트들과의 교전 중 부상을 입어 프랑스 전역(戰役) 기간 동안 전선에서 이탈해야 했다. 1939년 12월 21일, 11/7 비행대 소속 모란기 12대가 포테즈 63.11을 호위해 칼스루에-아헨 지역으로 향하던 중, I./JG 54 소속 Bf.109E 10대의 습격을 받았다. 혼전 속에서 고립된 고티에는 두 대의 Bf.109와 맞닥뜨렸다. 그는 첫 번째 기체의 꼬리에 붙어 50미터 거리에서 기관총을 퍼부었다. 그 기체의 조종사인 2./JG 54 편대장 하우프트만 파울리시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한편, 그루펜코만두어(비행단장) 소령 폰 크라몬-트라우바델이 고티에의 모란기 뒤로 접근해 사격을 가했다. 고티에는 머리에 중상을 입고 다량의 출혈이 발생했으며 의식을 잃었다. 지상 100미터 상공에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간신히 기체를 바로잡아 아르첸하임 인근 들판에 불시착했다.
이로써 그의 전선 생활은 끝나는 듯했고, 1년 뒤 비제르테에서 11/7 비행대와 재회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부대는 D.520 전투기로 기종 전환 후 긴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고티에는 1940년 9월 중위로 진급했다. 1942년 11월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토치 작전) 이후 북아프리카가 연합국 진영으로 복귀하면서 프랑스 공군도 재무장했다. 1943년 3월, 아당 사령관 휘하의 11/7 비행대가 첫 스피트파이어 Mk.V를 수령했다. 고티에는 1943년 3월 23일 정식으로 편대장으로 임명됐다. 9월 17일, 11/7 비행대가 코르시카 해방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아작시오에 상륙했다. 생활 여건은 열악했지만 독일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9월 30일 오후 5시경 전 스피트파이어기가 긴급 발진했다. 아작시오 항구를 폭격 중인 적기가 포착됐는데, 이스트르 기지 소속 Il./KG 100의 Do.217E 10대와 Ju.88 1대였다. 프랑스 측은 Do.217 4대 확정 격추와 1대 불확실 격추를 주장했다. 가브리엘 고티에 역시 확정 격추 1기를 기록했다.
11월 7일 코르시카가 해방된 후 지중해 상공의 제공권 장악에 기여했으며, 1944년 8월에는 프로방스 상륙 작전(드래군 작전)에 적극 참여했다. 9월 3일, 조종사들은 프랑스 본토 땅을 밟았다. 부대는 르 발롱에 주둔했다.

9월 15일, 디종 인근 임무 중 대공포화에 맞은 고티에는 적진인 아르세이 인근에 동체 착륙을 시도했다. 착륙 충격으로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콕핏에 화재가 발생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 되어, 그는 콕핏 밖으로 튕겨 나가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 독일군의 총소리에 정신이 들었고, 인근 숲에 숨어 있다가 F.F.I.(프랑스 국내군)에 의해 구조됐다. 그는 스위스로 탈출해 12월 부대에 복귀했다. 7/11 비행대 조종사들에게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1944년 12월 24일, 고티에가 이끄는 스피트파이어 12대가 본도르프 인근에서 IV./JG 53 소속 Bf.109G 약 30대와 Fw.190 편대와 맞붙었다. 격렬한 공중전 끝에 독일기 4대가 격추됐고, 고티에는 Bf.109 2기를 추가로 격추했으며 그중 1기는 윙맨 두 명과 공동 격추로 인정받았다.
1945년 4월 14일, G.C. 11/7의 마지막 교전에서 고티에는 동료 4명의 지원을 받으며 에르바흐 상공에서 Bf.109 1대를 확정 격추했다.
전쟁이 끝났다. 가브리엘 고티에는 미국 연수길에 올랐다. 1946년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참모부, 제31사무국, 라바트의 제6비행대, 메크네스 학교 등을 거쳤다. 1950년 3월, 디종의 제21비행대장을 맡아 '파트루이유 드 프랑스(Patrouille de France)'를 창설했다. 1956년 소집되어 수에즈 위기 당시 제31비행단을 지휘했다. 1960년 12월 준장으로 진급해 드골 장군의 개인 참모진에 합류했다. 1969년 12월 13일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72년 12월 비행 임무에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