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고무나무 아래의 포수들: 지트라 방어선의 붕괴

분산된 방어선, 머레이-라이언의 무리한 계획

1941년 12월, 말라야 북부 방어를 총괄한 머레이-라이언(Murray-Lyon) 소장의 구상은 단순했습니다. 도로 축선에 제15여단을 배치하고 좌익을 제6여단이 지원하며, 제28여단은 예비대로 보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의 모든 접근 경로를 두루 막으려다 부대를 지나치게 흩어놓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제15여단 하나가 정글과 논, 고무나무 재배지가 뒤섞인 험준한 지형 위 6킬로미터에 이르는 전선을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제6여단의 몫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이들의 방어 구역은 해안선까지 무려 17킬로미터에 걸쳐 있었습니다. 두 여단은 서로 지원할 수 없는 처지였고, 결국 머레이-라이언은 소중한 예비대마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창룬에서 시작된 붕괴

지트라(Jitra) 북방 방어를 맡은 것은 제15여단 소속 제1/14 펀자브 대대였습니다. 이들은 12월 10일 저녁까지 창룬(Changlun) 일대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오전 8시, 사에키(Saeki) 중령이 이끄는 정찰 부대가 전차 10대를 앞세우고 공격을 개시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일본군이 영국군 진지 여러 곳을 돌파하자 개러트(Garrett) 장군은 대대를 지트라 북쪽 2킬로미터 지점의 중간 거점 낭카(Nangka)로 물려 다음 날 아침까지 버티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사에키는 전차와 차량화 보병을 몰아 신속히 추격했고, 펀자브 대대를 따라잡아 완파했습니다.

침묵한 대전차포, 고무나무 아래의 병사들

영국 측은 이 참패의 원인을 제2 대전차포 중대의 화포가 작동 불능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증언은 훨씬 냉혹했습니다. 전투의 한복판에 있던 츠지(辻) 참모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포구를 우리 쪽으로 겨눈 열 문의 포가 도로변에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은 비바람을 피해 고무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고……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펀자브 대대가 무력화되자 일본군은 제2/1 구르카 대대를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타격해 산산조각 냈습니다. 제1/14 펀자브 대대와 마찬가지로 이 대대 역시 전투 부대로서의 기능을 곧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머레이-라이언은 카펜데일(Carpendale) 장군의 지휘 아래 있는 제28여단의 또 다른 대대를 투입했고, 이로써 마지막 예비대마저 잃게 됩니다.

오토 중위의 정찰과 밤의 공격

해 질 녘, 사에키는 오토(Otto) 중위가 지휘하는 정찰 순찰대를 영국군 우익을 담당하는 제2/9 구르카 대대 진지로 파견했습니다. 오토는 곧 복귀하여 보고했습니다. 중대들은 철조망 뒤에 참호를 파고 있었지만 전방 진지에는 빈틈이 있었고, 적은 그 틈을 메우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야간 공격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에키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오후 8시 30분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상보다 강력한 영국군의 반격에 공격은 일시적으로 멈추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예비 중대들을 추가 투입했지만 이마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연이은 실패에 분노한 사에키는 적진에 대한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해 스스로 목숨을 끝내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으나, 선임 장교의 만류로 뜻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지휘부의 우유부단함을 눈치챈 병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