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포병 진지를 노린 슈투카의 공습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슈투카 폭격기들도 공격에 나서 소련 포병 진지 파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일 조종사 한스 루델(Hans Rudel)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러시아인들의 대포는 그들이 설치한 지뢰만큼이나 셀 수 없이 많았고 위장은 완벽했다. 우리는 어떤 수림이든 하나의 포병 진지라고 간주해야 했다. 나무 사이로 급강하해야 했고, 다섯 번 중 네 번은 우리가 76mm 포를 명중시켰다. 물론 그 포가 먼저 우리를 격추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48 기갑군단의 고전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7월 5일 아침 독일 기갑부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덜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48 기갑군단 전체, 즉 제3·제11 기갑사단과 '게르만 근위대(Gross Deutschland)'는 포격으로 초토화된 마을들을 떠나 소련군의 다음 방어선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페나 강을 건너 시르제프(Ssyrzew)와 시르제보(Ssyrzewo)를 점령한 뒤,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베레조프카 삼림과 그 연장선상의 세 개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폭우로 인한 홍수가 이 작전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공병의 도움이 없이는 진격할 수 없었는데, 공병들은 소련 저격수와 항공기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시달렸다. 새벽이 밝아오자 제48군단 전 전선을 따라 밀집 대형으로 전개된 전차들은 극도로 취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수가 페나 강변의 늪지대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탓에 진창에 빠져 있었고, 모든 전차가 개활지에 노출되어 공습의 좋은 표적이 되고 있었다.
디트리히와 라이프슈탄다르테의 교묘한 작전
제48군단 우익에 배치된 세 개 무장친위(SS) 사단은 상대적으로 운이 따랐다. 이들이 공격한 지역은 지세가 약간 높았고 침수 지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용맹함과 담력으로 명성이 높던 무장친위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제프 디트리히(Sepp Dietrich)는 전차 부대를 11킬로미터 이상 전진시키며 T-34 전차 27대를 파괴했다. 늦은 오후 정찰대는 마을 그레무치(Gremutshy)에 적이 없다고 보고했지만, 디트리히는 버려진 목표에 함정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전차 행렬을 멈추고 지형의 요철에 차량들을 숨겨 철저히 은폐했다.
이 기동은 보람을 얻었다. 해 질 녘 그레무치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어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다음 라이프슈탄다르테 전체는 단 한 대의 전차 손실도 없이 진격을 재개했다. 포격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그레무치의 초가지붕 집들은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달빛 아래 디트리히의 전차들은 잿더미가 된 마을을 에워싸며 진지를 구축했다. 디트리히는 소련군이 자신들의 포격으로 적 전차 다수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리라 믿고, 따라서 독일군이 곧바로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적중했다.
판터 전차의 돌파와 허무한 결말
기습이 성패를 좌우하는 만큼, 디트리히는 폐허 치우기 같은 불필요한 정리 작업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이프슈탄다르테가 전진할수록 손실은 늘어갔다. 정오 무렵, 76mm 포화에 근접 거리가 아니면 관통당하지 않는 대형 판터 전차들은 베르호펜예(Werchopenje) 남쪽의 소련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48군단이 달성하지 못한 목표 중 하나인 노보셀로프카(Noweosselowka) 남쪽 260~1,600미터 선까지 진출했다.
손실은 고장과 소련군의 공격으로 인해 막중했다. 이날 하루는 전선 중앙부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실제로 남쪽 집게를 형성한 부대들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사흘째인 7월 7일에야 비로소였다.
전장의 참상
그 무렵 햇볕이 땅을 말려 전장의 풍경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황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마일에 걸쳐 유린당한 밀밭, 수백 대의 격파된 전차, 더위에 이미 부풀어 오른 시체들이 그것이었다. 한 병사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한 병사는 도랑에 웅크려 앉아 있다가 폭탄의 폭풍에 휩쓸렸다. 바지가 내려온 채였다. 이보다 더 굴욕적인 광경은 없었다."
지뢰밭은 엄청난 참화를 낳았다. 검게 그을린 살점과 뼈가 전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한 병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작은 수림에 살금살금 다가가 고개를 들었는데, 나무 위에서 저격수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나는 그가 나를 먼저 쏘기 전에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통이었다. 폭발로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가 입술에 미소 같은 것을 띤 채 가지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올라가 그것을 떼어내 땅에 떨어뜨렸다.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지만, 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500대의 전차가 충돌한 시르제보 전투
소련군은 그레무치의 폐허로 후퇴하여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제48 기갑군단은 늦게나마 작전을 개시, 북서쪽으로 협공을 시도했다. 기습은 성공했다. 독일군은 시르제프 양측면에서 강력하게 돌파했고, 제7근위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여 베르호펜예 너머의 243고지 뒤편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치밀하게 준비되고 조준된 독일군의 차단 포격에 전차와 포 70문을 잃었다.
전방이 열리자 '게르만 근위대'는 기세를 몰아 시르제보로 진격했고,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소련군은 당분간 무기력한 듯 보였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그들은 재기를 하여 시르제보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이는 극도로 격렬한 정면 충돌로 번졌다. 500대의 전차가 몇 시간 동안 격돌했지만, 해 질 녘까지 어느 쪽도 한 발짝 전진하지 못했다.
결국, 소모전의 극치
쿠르스크 전투의 본질이 상상력 없는 싸움 속에서 인력과 물자를 어마어마하게 낭비하는 것임이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다. 이론상 짧게 끝났어야 할 대규모 충돌이었으나, 5일이 지나도록 결정적 국면에 도달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규모가 대규모와 맞부딪치는 소모전만이 계속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