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침공의 붕괴
1940년 6월 6일, 독일군은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바탕으로 남쪽 방면의 공세를 재개했습니다. 일부 프랑스 부대는 영웅적인 저항을 펼쳤지만, 독일군의 진격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이어졌습니다. 곧 독일군은 셰르 강(Cher)에 도달했는데, 이곳은 훗날 점령 지역과 자유 지역을 가르는 분계선이 되는 경계였습니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알프스 산맥에서 그들의 공세는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6월 14일, 독일 기갑부대가 무방비 도시로 선포된 파리에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6월 22일, 프랑스는 콩피에뉴 숲의 레톤드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이러한 참패 이후에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노선의 프랑스 병사들은 스스로가 패배했다고 믿지 않은 채 계속 저항했으며, 일부는 7월 중순까지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알프스 방면의 프랑스군 역시 마지막 전투의 날까지 이탈리아군의 모든 공격을 비교적 쉽게 격퇴하며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영토 대부분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국토는 북부·서부·남서부를 포함해 독일이 군정 통치를 실시하는 '점령 지역'과, 중부·남부로 구성되어 필리프 페탱(Marshal Philippe Pétain) 원수의 비시 정부가 다스리는 '자유 지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휴전 협정
6월 17일 새로 출범한 페탱 정부가 휴전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자, 모두 최악의 결과를 예상했습니다. 1918년 11월 독일 전권위원들에게 프랑스가 요구했던 가혹하고 굴욕적인 조건들을 떠올리면, 제3제국 당국이 어떤 가혹한 보복을 가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40년 6월 프랑스에게 주어진 조건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연합군이 궤멸되거나 포로로 잡혔고, 국토의 약 3분의 2가 독일 국방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도, 휴전 협정은 프랑스 함대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정부와 베르사유 조약 체제의 군대처럼 10만 명으로 축소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자유 지역'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나아가 독일은 동맹국 이탈리아마저 압박해 함대와 튀니지 관련 요구를 일부 철회하게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1940년 7월 10일 선출된 새로운 프랑스 국가 정부의 많은 인사들은 곧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독일은 점령군 유지비 명목으로 하루 4억 프랑을 요구했고, 라이히스마르크와 프랑화 사이의 강제 환율을 통해 군정 경제 부서와 SS가 프랑스를 체계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여기에 휴전 위원회는 자유 지역 당국의 명목상 자율성에 엄격한 제한을 가했고, 반나치 난민에 대한 '불공정한' 조건까지 부과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독일 당국의 태도를 완화시킨 것은 1940년 7월 프랑스 함대가 지닌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실행된 작전 '캐터펄트(Operation Catapult)'였습니다. 메르스엘케비르 참사로 이어진 이 작전은 페탱 정부와의 관계에서 독일 당국이 더 유연한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고, 페탱 정부의 요청에 따라 협력 정책까지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연출한 굴욕의 서명식
휴전 협정 서명을 위해 히틀러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1918년 휴전 열차 객차를 콩피에뉴 숲으로 옮기도록 명령했습니다. 바로 1918년 11월 11일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휴전 협정 서명 당일, 히틀러는 늦게 도착했고, 그의 도착과 함께 독일 국가가 연주되었습니다. 그는 1918년 포슈 원수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착석했습니다.
휴전 협정 서명이 끝난 후, 히틀러는 객차를 나와 포슈 원수의 동상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동상 발치에는 쓰러진 독일 독수리와 함께 "독일의 긍지가 이곳에서 짓밟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