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프랑스 소뮈르(Saumur)의 기병응용학교(École d'Application de la Cavalerie) 예비 생도들은 훈련용 장비만으로 무장한 채 루아르(Loire) 강으로 진격하는 독일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이들은 희생적인 전투 끝에 '소뮈르 생도(Cadets de Saumur)'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진격과 루아르 방어선
1940년 5월,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에서 싸우던 프랑스군은 솜(Somme) 강과 엔(Aisne) 강 방어선에서 독일 기갑사단의 공세를 막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이 센(Seine) 강을 향해 남진하자,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군의 프랑스 남부 침공을 차단하기 위해 각 하천을 방어선으로 활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특히 폭이 넓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루아르 강은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 핵심 장애물로 여겨졌습니다.
소뮈르 기병학교에 맡겨진 방어 임무
캉드생마르탱(Candes-Saint-Martin)부터 투리엘(Thouriel, 멘에루아르주)까지의 구간은 미숏(Michon) 대령이 지휘하는 소뮈르 기병학교에 배정되었으며, 이곳에는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도하 지점이 되는 다리 4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6월 15일, 기병학교는 소뮈르를 철수해 몽토방(Montauban)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미숏 대령은 패배주의적 후퇴 분위기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학교의 장교들과 생도들을 남겨 배정 구역을 방어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결국 철수 명령은 비전투 요원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계속 싸우겠다" – 프랑스 본토 최초의 무장 저항
6월 17일, 페탱(Pétain) 원수는 휴전 협상을 앞두고 프랑스군에 전투 중지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미숏 대령은 지휘관들을 소집해 상황을 설명했고, 모든 장교와 생도는 자발적으로 계속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희생의 정신으로 프랑스 육군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이 결단은, 프랑스 본토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무장 저항으로 평가됩니다.
약 2,500명의 병력과 빈약한 무장
방어 부대의 핵심은 제4훈련사단 소속 기병 예비 생도 550명과 수송병 과정 생도(ÉAR, 현재의 사관후보생 EOR에 해당) 240명으로, 지도교관들이 이들을 지휘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지역 내 훈련센터 출신 병사 360명(카디냥(de Cadignan) 대위 지휘), 몽클로(Monclos) 대위가 이끄는 병력 80명, 제13 알제리 저격병연대 소속 보병 및 기관총 사수 200명, 생메상(Saint-Maixent) 보병학교 출신 350명 규모의 대대, 뇌셰즈(Neuchèze) 대위 지휘의 기동화 부대, 고블(Gobble) 대위의 정찰 중대, 그리고 제19 용기병 연대의 일부 기병들이 합류했습니다.
결국 약 2,500명의 병력이 장갑차 24대, 75mm 포 5문, 대전차포 13문, 박격포 15문이라는 빈약한 화력으로 40km에 달하는 방어선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2개 독일 사단을 이틀 넘게 저지하다
이들은 제1기병사단을 포함한 독일군 2개 사단 이상, 즉 약 4만 명의 병력과 장갑차량 150대, 야포 300문, 그리고 루프트바페(공군)의 지원까지 받는 적과 맞서 2일 넘게 진격을 막아냈습니다.
적조차 인정한 '생도들'
훈련용 무장만으로 병력과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적과 맞선 이들의 영웅적 전투는 승자인 독일군조차 인정했습니다. 독일 제1기병사단장 펠트(Feldt) 소장은 이들에게 '생도(Cadets)'라는 이름을 부여했으며, 장교들의 지휘 아래 독일군 호위 없이 자유롭게 분계선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부아예레로슈(Beaulieu-lès-Loches)의 다리를 건널 때에는 국방군 한 개 분대가 그들에게 군례를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전투의 대가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5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독일군은 132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