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세느강 밑으로 뚫린 다섯 개의 케이슨 — 파리 지하철 건설의 숨은 이야기

20세기 초 파리 지하철 건설 사업은 엔지니어들에게 여러 난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생마르탱 운하(Canal Saint-Martin)였습니다. 공사 기간 동안 운하의 물을 임시로 빼낸 뒤, 하상(河床) 바닥에서 5미터 아래를 지나는 터널을 건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느강, 가장 큰 장애물

하지만 무엇보다 큰 걸림돌은 단연 세느강이었습니다. 샤틀레(Châtelet)와 생미셸 대로(boulevard Saint-Michel) 사이 구간에서는 강의 두 지류를 차례로 통과해야 했습니다. 원래 노선은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 아래를 지나도록 계획되었지만, '불멸자들'이라 불리는 학사원 회원들이 이를 지고의 학문에 대한 모욕이라며 항의했고, 결국 비앙브뉘(Bienvenüe)는 설계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넓은 강줄기에는 길이 36미터, 38미터, 43미터, 폭 9.60미터, 높이 9미터의 케이슨(잠함) 세 개가, 좁은 강줄기에는 나머지 치수는 같고 길이만 20미터인 케이슨 두 개가 각각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다섯 개의 케이슨 각각에는 높이 1.80미터의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세 개의 케이슨은 샹주르세교(Pont-au-Change) 상류에, 나머지 두 개는 생미셸교(Pont Saint-Michel) 상류에 각각 침하시킨 뒤, 점차 강바닥 아래 15미터 지점까지 가라앉혔습니다. 이 긴 작업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다섯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페라 광장의 기적

비앙브뉘의 또 다른 위업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것은 오페라 광장 앞에서 진행된 공사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세 개의 노선이 교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페라 드 파리는 원래 거대한 지하 수맥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엔지니어들의 계산을 크게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광장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드러난 채 방치되어 도시의 품위를 해쳤고, 이후 도로면 아래 22미터까지 가라앉힌 철제 상자를 활용해 거대한 석조 기둥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비앙브뉘의 경쟁자, 베르리에

이런 공사들이 진행되는 동안 엔지니어 베르리에(Berlier)는 시의회로부터 비앙브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또 다른 지하 노선의 특허권을 따냈습니다. 몽마르트르(Montmartre)와 몽파르나스(Montparnasse)를 잇는 이 소위 '북남선(Nord-Sud)' 역시 세느강 하상 아래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 밖의 구간에서는 강을 지상으로 건너는 방식이 택해졌습니다.

파리 곳곳에 피어난 신기술의 꽃

그동안 지하철은 이미 굴러가기 시작했고, 운행 구간은 점점 늘어갔으며 역도 하나둘 생겨났습니다. 파리 곳곳에는 지하 통로의 입구를 알리는 작은 신전을 연상시키는 멋진 출입구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주철 난간에는 서로 얽힌 긴 줄기 문양이 새겨졌습니다. 건축가 기마르(Guimard)가 사랑한 '식물풍' 양식, 즉 아르누보는 세기 초 파리에서 화려한 승리를 누렸습니다.

고고학자들에게는 뜻밖의 축복

일부 미학자들은 이런 변화를 우려하는 눈치였지만, 지질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들뜬 기분이었습니다. 지하철 건설 공사야말로 그들에게 뜻밖의 축복이 아니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파리의 기반을 이루는 지층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센세이션을 일으킬 발견들을 쏟아냈습니다. 석관, 토기, 부조, 심지어 매머드 뼈까지 말입니다!

점쟁이의 불길한 예언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1902년 어느 날, 한 기자가 유명한 점쟁이 카빌 부인(Mme Kaville)을 찾아가 자신의 미래를 점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점쟁이는 음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년에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물론 이는 별로 대단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어차피 비극적인 사건들로 가득한 곳이니까요. 그럼에도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의 지하철을 애도하게 될 중대한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