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빌'에서 '드라군'까지, 프로방스 상륙작전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전역 가운데 연합군의 프로방스 상륙작전, 이른바 '드라군(Dragoon)' 작전만큼 격렬한 찬반 논쟁을 촉발한 사례는 드물다. 원래 '애빌(Anvil)'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린 이 작전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앞장서 강력히 밀어붙였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인 '오버로드(Overlord)'의 필수적인 보완책으로 간주되었다.
테헤란과 카이로 회담(1943년 11~12월)에서 '애빌'과 '오버로드'는 1944년 초여름 같은 날 시행하기로 예정되었다. 두 작전은 남북 축을 따라 프랑스 내 독일군을 협공해 집어삼키는 포위 섬멸 구상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역시 협공이라는 기본 골격에는 동의했지만, 남쪽의 '턱'을 프로방스에 두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끓임없이 이견을 제기했다.
처칠이 우려한 '소련에 자유로운 손을 내주는 결과'
처칠을 비롯해 프로방스 상륙에 반대한 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영미의 전쟁 역량이 유럽에서 너무 서쪽으로 쏠린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동쪽에서 독일을 압박하는 소련군에게 자유로운 행보를 내주는 꼴이 되고, 소련은 전후 유럽의 상당 부분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발칸 반도를 통한 공세, 즉 알바니아와 그리스를 거쳐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는 방안은 이런 위험한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프랑스 남동부나 오스트리아 남부·독일 방면으로 돌파구를 여는 안도 마찬가지였다. 순수하게 이탈리아 노선을 택하면 당시 반도 북부를 향해 느리고 값비싼 진격을 벌이던 연합군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과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조기에 종결할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오버로드 성공에 몰두한 루즈벨트와 아이젠하워
그러나 루즈벨트와 아이젠하워는 다른 식으로 판단했다. 두 사람은 '오버로드'와 그 성공에 온전히 몰두해 있었다. 그들 눈에 프랑스 남부 침공은 이탈리아, 발칸, 아니면 브르타뉴 해안(애빌 반대파가 내놓은 또 다른 대안)에서의 작전보다 나은 보장을 주는, 승리의 필수 담보였다. 프로방스에 상당 규모의 연합군을 주둔시키면 아이젠하워는 심수항을 확보할 수 있고, 노르망디 병력이 고립될 경우 신속히 구원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며, 적을 두 개의 분리된 전선으로 분산시켜 '오버로드' 추진에 대한 독일군의 저항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처칠은 이런 논리에 끝내 납득하지 않았고, 작전 개시 직전까지도 미국 측의 생각을 바꾸려 애썼다. '오버로드'는 6월 6일 개시되었지만 '애빌'은 원래 계획대로 동시에 실시되지 못했다. 상륙정 부족도 한몫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로마 인근 안치오 교두보에 갇힌 미 제3·제45사단이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연합군 제3군과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노르망디 진격 지연, 결국 처칠의 굴복
D데이 이후 노르망디에서의 연합군 진격은 둔화되었고, 6월 23일에는 예상 일정에 뒤처졌다. 이 지연은 미국 측이 '애빌'을 더욱 강력하게 재추진하는 빌미가 되었다. 강력한 동맹국과 정면으로 맞서 늘어질 만큼 고집스럽지 않았던 처칠은 결국 굴복했고, 자신이 "따분하고 결실 없는 사업"이라 부른 이 작전에 동의했다.
7월 2일, 지중해 연합군 최고사령관 헨리 메이트랜드 윌슨(Henry Maitland Wilson) 경은 8월 15일 프로방스 상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제 이 작전을 노르망디를 내리치는 '망치'를 받쳐주는 '모루(anvil)'라고 부를 수 없게 되자, 처칠은 코드명을 '드라군(Dragoon)'으로 변경했다.
작전 편성과 비교적 순탄했던 준비
해상 상륙 작전의 대부분은 알렉산더 M. 패치(Alexander M. Patch) 장군이 지휘하는 미 제7군 예하 제3·제36·제45사단이 맡았으며, 프랑스 제2군단이 증원되었다. 공중 작전은 제12전술공군 사령관 P. 세빌(P. Saville) 공군 준장이, 해상 작전은 왕립해군의 존 H.D. 커닝엄(John H.D. Cunningham) 제독이 각각 지휘했다. 해군 특무부대의 총지휘는 미국의 헨리 K. 휴잇(Henry K. Hewitt) 부제독이 맡았으며, 드라트르 드 타시니(de Lattre de Tassigny) 장군의 프랑스 제1군 7개 사단도 참전할 예정이었다.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에서 거친 이전 상륙작전들이 위험하고 비극적인 국면을 자주 낳았던 것과 비교하면, 카발레르(Cavalaire)부터 아게(Agay)까지 55km 전선에 걸쳐 계획된 이번 작전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사안처럼 보였다. 연합군은 이전의 험난한 경험에서 얻은 교훈, 특히 수륙양용 작전에서 공군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미 몸으로 익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