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민병대는 그렇다, 군인은 아니다! 스페인 내전 발발과 공화파의 기로

1936년 7월 17일, 카나리아 제도 총사령관 프란시스코 프랑코 바아몬데(Francisco Franco Bahamonde) 장군은 공화정부에 대한 반기를 든 뒤 테네리페에서 모로코의 테투안으로 향했다. 다음 날인 18일, 그의 주도로 소위 '국민운동'이 일어났고, 프랑코는 같은 날 반란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틀 뒤인 19일에는 병력 수송선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스페인 내전의 포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양 진영의 구상은 대체로 막연했고, 사람들의 마음도 우유부단했다. 그러나 적대 행위가 시작되자 생각은 빠르게 분명해졌고, 기존 인물들 곁에 새로운 지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진영이든 자신의 도덕적 역량을 가늠하고 물질적 전력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정치 문제와 군사 문제는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혼란은 공화파 진영에서나 아직 '프랑코파'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 반란군 진영에서나 마찬가지로 컸다.

정부 측의 역량: 넓지만 분열된 정치 스펙트럼

정부 측 도덕적 역량의 핵심은 좌파 공화 정당과 자치주의 세력이었다. 공화좌파(Izquierda Republicana), 공화연합(Unión Republicana), 카탈루냐 좌파(Esquerra Catalana), 그리고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이 그 중심이었다.

여기에 극쪽에서는 노동자 정당들이 이들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사회당과 공산당,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그리고 무정부주의 조직인 이베리아 무정부주의자 연맹(FAI)이 그것이다. 노동조합 역시 두 축을 이루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총연합(UGT), 다른 하나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전국노동연합(CNT)이었다.

이토록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은 달성해야 할 목표에 대한 이견으로 직결되었다. 극좌는 전쟁과 혁명을 분리하지 않았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원을 받는 '노동자 군대'를 내세웠다. 반면 공화파 정당, 카탈루냐·바스크 자치주의자들, 사회당 우파, 그리고 공산당은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며, 혁명은 그다음 과제"라고 주장했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군대, 그리고 '민병대'라는 선택

상반되는 이 두 노선은 정부군 특유의 이질적 성격을 낳은 원천이 되었다. 정부군의 물질적 전력은 해군 전부와 공군의 거의 전부를 손에 넣었지만, 정작 간부가 크게 부족했다. 물론 용감하고 열정적인 지휘관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에르난데스 사라비아(Hernández Sarabia), 아센시오(Asensio), 미아하(Miaja), 리켈메(Riquelme) 장군과 망가다(Mangada), 에스코바르(Escobar), 비야르바(Villalba) 대령 등이 그 예였다.

그러나 하급 장교는 드물었고 병사들은 경험이 없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산업 지역에서 급하게 동원된 이들은 애초에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적 요소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 즉석 병사들 대다수에게 최우선 정체성은 '군인'이 아니라 '당원'이었고, 상당수는 애초에 반군국주의자였다. 그들을 복종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의 규율은 받아들이면서도 군대의 규율은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건 구호가 바로 이것이었다.
"민병대는 그렇다, 군인은 아니다!"

이 구호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전쟁 초기 공화파가 실제로 의지한 것은 정규군이 아니라 각 정당과 노조가 자체적으로 편성한 민병대(밀리시아) 부대였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패배를 거듭할수록 '군의 재건' 요구가 커졌고, 1936년 말부터 1937년에 걸쳐 인민군(Ejército Popular) 창설과 함께 민병대는 정규군 체계로 통합되어 갔다. '민병대냐 군대냐'의 갈등은 이후 공화파 진영 내부 정치를 좌우하는 최대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