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 1872년 9월 20일 ~ 1958년 4월 18일)은 프랑스의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가짜 전쟁' 기간과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그는 세단 전투에서 독일군의 돌파에 의해 전략이 격파당했으며, 비시 정권 시기에 체포되어 독일에서 수용 생활을 했다.
유년기와 교육
1872년 파리 7구 생제르맹 대로 262번지, 육군성 맞은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피린은 나폴레옹 3세 휘하에서 복무한 육군 회계감사관으로,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당했다. 외가인 우리히 가문은 알자스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군사에 관심이 많았으나 예술적 재능도 인정받아 부모는 처음엔 그쪽을 권유했다. 스타니슬라스 중학교를 거쳐 1891년 생시르 사관학교에 입교, 1893년 수석 졸업했다.
초기 군 경력
알제리 제3보병연대와 튀니지 지형측량대에서 장교 생활을 시작했으며, 드로잉과 관찰 재능을 살렸다. 1897년 귀국해 육군대학(École Supérieure de Guerre) 입학시험 8등으로 입교해 2등으로 졸업했다. 란레작 장군의 눈에 띄어 참모 과정에 들어갔고, 1904년 제15기갑대대 중대장으로 야전 지휘관으로도 탁월함을 보였다. 1906년 『전쟁 예술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출간해 당대 최고 군사 사상가 반열에 올랐다.
인생의 전환점은 1906년, 제6보병사단장이던 조프르 장군의 부관으로 임명되면서 왔다. 이는 당시 육군대학 교수였던 포슈 중령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후 조프르와 경력을 같이하며 1908년 제2군단 참모, 1910년 최고전쟁위원회, 1911년 대대장, 1914년 3월 참모본부로 복귀했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조프르의 최측근 참모로 마른 전투 승리로 이끈 명령서를 작성했다. 정치와 군사의 밀접한 관계를 실감한 시기이기도 하다. 1914년 11월 중령으로 제2기갑반여단을 지휘해 알자스(링게 전선)와 솜 전투에 참전했다. 1916년 4월 대령, 12월 준장(임시)으로 초고속 진급했다. 미셸러 장군 예비군단 참모장을 거쳐 1917년 5월 제9보병사단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1918년 봄 누아용 전투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아끼면서도 탁월한 전술 지휘를 보였다.
전간기
1919~1924년 브라질 프랑스 군사사절단장, 1924~1929년 레반트(시리아·레바논) 주둔군 사령관으로 영토 평정에 기여했다. 귀국 후 낭시 제20군구 사령관을 지냈다. 에두아르 달라디에의 전폭적 지지로 1931년 웨이강을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1935년부터 육군감찰관을 겸임했다. 조프르 이래 최대 권한을 가진 육군 수뇌부가 되었고, 1938년 1월 21일 칙령으로 초대 국방참모총장(육·해·공 3군 조정 임무)에 임명되었다.
가믈랭은 임박한 전쟁에 대비한 프랑스 군비, 편제, 훈련에 자신의 독자적(그러나 모호하거나 구식인) 구상을 깊이 심어놓았다. 1913년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1932년 7월 8일 그랑크루아에 서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전략과 오판
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군 총사령관(제네랄리시모) 가믈랭은 당대 가장 지적인 장군 중 하나로, 독일에서도 그 지성과 세련됨을 인정받았다. 화려한 제1차 대전 전공에도 불구하고, 1940년 5월 프랑스 전역에서의 지휘는 재앙이었다.
그는 독일의 공격을 기다리는 소극적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스위스에서 북해까지 마지노선-아르덴 숲(2선급 사단 배치)-기동부대(해안까지)로 이어지는 연속 전선을 구축했다. 벨기에·네덜란드 침공을 예상해 디선(Dyle Line)까지 진격해 전선을 단축하고 벨기에군과 합류하는 '디선 계획'을 수립했다.
여기에 '브레다 변형(Breda Variant)'을 추가해 지로 제7군을 최북단에 배치, 네덜란드군과 연계하려 했다. 이 기동으로 프랑스 최정예 부대와 항공 지원이 진짜 독일 주공 격돌 지점인 세단에서 멀리 이탈했다.
해임과 비판
세단 돌파 후 1940년 5월 17일, 폴 레노 총리는 가믈랭을 해임하고 웨이강을 후임으로 앉혔다. 그의 주요 과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지적된다.
- 지도력·조직력 부재와 카리스마 결여: 부하들은 그를 '보들레르'라 불렀다. "선을 이동시키는 움직임을 나는 증오한다"는 시구처럼 수동적 교리에 매몰됐다.
- 구식 교리 고수: 항공·전차·기계화부대·포병·요새 운용에 대한 인식이 구태의연했다. 폴란드 전역의 속도감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폴란드는 프랑스가 아니다"라며 1차 대전 경험만 고집했다. 정부와 다수 장교도 같은 입장이긴 했다.
- 최고 지휘부 혼란: 벨기에 전선에서 빌로트 제1집단군사령관, 조르주 동북전선사령관, 총사령관 본인 중 누가 연합군 지휘권자인지 불분명했다. 5월 10일 벨기에 국왕 레오폴 3세에게 파견한 연락장교는 효과적 협조엔 너무 늦었다. (회고록 『봉사』에선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독일의 아르덴 공격 계획을 알았다고 주장)
- 전선 이탈 지휘: 뱅센 참모본부에 머물며 파리 정치권과 접촉을 중시했다. 무선 대신 유선 전화와 연락장교를 고집해 의사결정이 독일보다 현저히 느렸다. 1938년 전쟁지휘법에 따라 전시 지휘권이 정부에 있어 뱅센 잔류가 법적 의무였다는 변론도 있다.
- 아르덴 방임: 벨기에 경고에도 아르덴을 '불가침'으로 간주했다. 제9군 사령관 코라프가 병력·장비 부족과 취약성을 거듭 경고했으나 묵살했다. 마지노선 후방에 대병력을 묶어둔 것도 병력 낭비였다.
클레망소의 말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섬세한 것"을 체현한 사례라 할 만하다. 회고록에서 반격 준비 중 해임됐다고 강변하지만 수많은 실책은 덮을 수 없다.
정치적 배경
레노가 가믈랭을 경질한 데엔 정치적 이유도 컸다. 가믈랭의 후원자가 달라디에였고, 달라디에와 레노 사이엔 뿌리 깊은 적대감이 있었다. 제3공화정 말기의 특징적 갈등이다. 레노는 전쟁·국방장관직을 원했으나 달라디에가 차지하는 조건으로 내각에 참여했다.
드골도 가믈랭을 불신했다(『전쟁 회고록』 27~28쪽). 역설적으로 1940년 4월 말 제4기갑사단 지휘관으로 발탁하고 임시 준장 진급을 추천한 사람이 가믈랭이었다.
독일 포로 생활 중 레노와 화해했는데, 레노는 페탱과 웨이강에게 속았다고 고백했다. 달라디에-레노 협상 때 페탱은 스페인 대사, 웨이강은 레반트 원수로 멀리 있었으나, 5월 17일 가믈랭 후임으로 웨이강이 소환되고 레노가 페탱을 부수상으로 기용했다.
3월 22일 내각 출범부터 레노 주변엔 '주전파'와 '주화파'가 공존했고, 최측근인 엘렌 데 포르트 백작부인 등 '주화파'가 득세했다. 드골을 3월부터 입각시키고 싶었으나 달라디에가 반대해 5~6월 개각 때 달라디에 퇴진 후 국방차관으로 기용됐다.
리옹 재판과 수감
패전 후 1940년 9월 6일 체포되어 리옹 재판에서 레옹 블룸, 달라디에, 레노와 함께 피고로 섰다. 고발인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그와 달리 공동 피고들의 반박이 거세 재판은 조기 종료됐다. 비시 정권에 의해 피레네 산맥 포르탈레 요새에 블룸, 달라디에와 함께 수감됐다. 1942년 11월 자유지역 독일 점령 후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인근 별도 막사(난방 시설 있음)에 블룸, 레옹 주오와 함께 이감됐다. 곧 오스트리아 이터 성으로 옮겨져 레노, 장 보로트라, 이후 웨이강, 라 로크 대령과 합류했다. 1945년 5월 5일 미군에 의해 해방됐다.
전후와 최후
귀국 후 희생자 행세를 했으나 별다른 추궁은 받지 않았다. 회고록 『봉사』(Servir, 1946, 3권)를 출간해 1939~1940년 전선 지휘를 변론했다. 처칠은 자서전에서 그를 "조국을 사랑하고 선한 의도로 가득하며 제 직분을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1958년 4월 18일 발드그라스 병원(파리 5구)에서 별세, 파시 공동묘지(파리 16구)에서 검소하게 안장됐다. 정부는 전우들의 철야 추모와 앵발리드 성당 장례 미사를 거부했다.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수훈자 예우만 갖췄다. 부인은 1964년 작고했다.
주요 저서
- 『전쟁 예술에 대한 철학적 연구』, 샤펠로, 파리, 1906, 107쪽
- 『전전기의 세 단계』, 레 제브르 리브르, 파리, 1921
- 『전시 의료 항공 편제·운용 훈령』, 국립인쇄소, 1932, 9쪽
- 『봉사』 제1권: 1940년 프랑스군, 플롱, 파리, 1946, 380쪽
- 『봉사』 제2권: 비극의 서막, 1930~1939년 8월, 플롱, 파리, 1946, 479쪽
- 『봉사』 제3권: 전쟁, 1939년 9월~1940년 5월 19일, 플롱, 파리, 1946, 537쪽
- 『마른 전투의 기동과 승리』, 베르나르 그라세, 1954
매독설과 논란
일부 역사가들(소수설)에 따르면 가믈랭은 매독(신경매독)을 앓았으며, 이로 인해 판단력이 저하됐다는 주장이 있다. 86세까지 온전한 정신으로 회고록을 집필한 점을 들어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역사학자 제라르 쇼비(Gérard Chauvy)는 '신경매독'을 명시하며 발병 시기를 1930년 이전으로 본다. '말라리아 요법(열 요법)' 기록, '끔찍한 병', '전신 동맥경화 영향', 1958년 사인을 '전신 마비(신경매독 말기)'로 기록한 자료 등을 근거로 든다. 쇼비의 주장은 국방부 사료관 문서와 『우리를 다스리는 환자들』이란 문헌 두 가지에 기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