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2월 14일, 칠레 해군이 당시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 항구에 상륙했습니다. 이로써 이른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칠레, 페루, 볼리비아 세 나라가 얽힌 이 분쟁은 1884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과 볼리비아는 유일한 바다 출구였던 리토랄 주를 칠레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오늘날까지 그 지역은 칠레의 손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초석, 볼리비아의 ‘흰 금’
분쟁의 도화선은 초석(질산나트륨) 광맥의 개발이었습니다. 19세기 말, 이 원료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녀 ‘흰 금’이라 불렸습니다. 초석은 사막 표면 아래에 매장된 일종의 염류인 칼리체(caliche)를 정제해 얻는 천연 질산나트륨으로, 그 광상은 거의 대부분 칠레·볼리비아·페루 접경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비료와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질산염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초석은 국제 산업과 무역에서 가장 탐나는 상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같은 지역 특산의 또 다른 고급 비료인 구아노(바닷새의 배설물) 무역을 둘러싼 세 나라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초석 채굴 활동은 오랫동안 페루의 타라파카 주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호세 산토스 오사(José Santos Ossa) 덕분에 큰 활력을 얻게 됩니다. 1860년대, 이 칠레 출신 광업 기업가는 아타카마 지역에서 대규모 초석 광맥을 발견했는데, 그중에서도 살라르 델 카르멘(Salar del Carmen)이 두드러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광석 개발은 볼리비아의 리토랄 주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광산 회사들의 전쟁
오사는 다른 칠레 동업자들과 발파라이소에 거점을 둔 영국 상인들의 자본을 바탕으로 멜버른 클라크 앤 컴퍼니(Melbourne Clark & Co.)를 설립하고, 볼리비아 정부로부터 15년간 개발권을 보장받는 허가를 얻었습니다. 1872년 자치시가 된 미래의 도시 안토파가스타는 바로 이 광산 회사의 임시 캠프 위에 세워졌습니다. 2년 후인 1874년, 칠레와 볼리비아는 국경 조약에 서명합니다. 이 협정은 양국의 공동 국경을 확정하고, 1840년부터 이어져 온 구아노 광상 개발권을 둘러싼 영토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동시에 멜버른 클라크 앤 컴퍼니는 20년간 볼리비아 정부에 새로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도 명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이후 몇 년간 팽창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며 국경 밖의 새로운 광맥 탐사를 장려했습니다. 조약 직후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멜버른 클라크 앤 컴퍼니는 해안과 살라르 델 카르멘을 잇는 철도 건설을 완공했고, 칠레가 통제하는 초석 광맥은 이미 안토파가스타 인근 볼리비아 연안 전역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호세 산토스 오사가 이미 손을 뗀 이 회사는 ‘안토파가스타 초석철도회사(Compañía de Salitres y Ferrocarril de Antofagasta)’로 재편됩니다. 주요 주주는 칠레 실업가 아구스틴 에드워즈(Agustín Edwards)와, 그때까지 구아노 개발에 기반을 둔 영국 회사 깁스 앤 컴퍼니(Gibbs & Co.)였습니다.
광산은 이미 대부분 칠레 기업들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칠레는 더 원했습니다. 광물이 풍부한 이 볼리비아 영토를 통째로 차지하려 한 것입니다. 경제적 경쟁 뒤에는 전쟁의 포성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1874년 조약은 그동안 볼리비아의 영토 주권에 대한 위협을 어느 정도 억제해 왔습니다. 그러나 질산염 산업이 성장하고 연안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리토랄 주로 향하는 칠레 노동자의 수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1870년대 말, 안토파가스타 인구의 93%가 이미 칠레인이었고 볼리비아인은 겨우 2%에 불과했습니다. 리토랄 주는 소수의 병력이 지키는 법적 지위만 남을 뿐, 사실상 볼리비아의 실체가 없는 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1878년, 영국계 칠레 질산염 기업들이 날로 세력을 키우는 데 반해 볼리비아가 이 개발에서 얻는 수익은 턱없이 적자, 볼리비아 국민의회는 안토파가스타 초석철도회사의 초석 수출 1캔털(quintal)당 10센티모의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사는 이것이 양국 간 영토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칠레 의회에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공격이라고 항의했습니다. 게다가 회사의 총관리자였던 영국인 조지 힉스(George Hicks)는 칠레에 ‘볼리비아인이라는 역병’으로부터 태평양을 해방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며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참고로 질산염 회사와 칠레 정부의 유착 관계는 악명 높았습니다. 내무장관 호세 프란시스코 베르가라(José Francisco Vergara), 육군장관 라파엘 소토마요르(Rafael Sotomayor)를 비롯한 여러 의회 의원들이 이 회사의 주주였습니다.
칠레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안토파가스타 초석철도회사는 기존 협정 위반이라는 이유를 들며 볼리비아 정부가 요구한 세금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볼리비아 정부는 이에 대해 회사 자산의 압류와 경매를 명령으로 대응했습니다. 페루 역시 구아노와 초석 관련 칠레 기업들을 몰수하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세 나라는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칠레의 기습 점령
1879년 2월 14일, 안토파가스타 초석철도회사 자산의 몰수 및 공개 경매가 예정된 바로 그날, 칠레 군대는 경매가 열리기 전에 안토파가스타 시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 이전 몇 년간 칠레는 영국의 지원으로 해군 강국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영국은 칠레 해군 함선의 상당 부분을 자금 지원하고 건조해 준 것입니다. 덕분에 전쟁 발발 불과 두 달 만에 칠레는 안토파가스타 연안 전역을 장악했습니다. 분쟁은 이후 4년 더 이어졌고, 그동안 모든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전, 점령, 전세의 기복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볼리비아는 바다로 통하는 길을 영원히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은 1884년 4월 4일 칠레와 볼리비아가 서명한 휴전 협정으로 공식 종결되었습니다. 20년 후 체결된 평화 우호 조약은 칠레가 볼리비아 연안을 영구히 할양받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 대가로 볼리비아는 칠레 항구를 통해 자국의 물품과 상품을 자유롭게 통과시킬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이 협정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드러났고, 1910년 이후 볼리비아의 역대 정부들은 끊임없이 태평양으로 통하는 출구권을 요구해 왔습니다. 2018년, 유엔의 최고 사법 기구인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는 칠레가 볼리비아와 ‘협상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볼리비아는 즉각 이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편 칠레의 초석 판매 호황은 이후 몇 년간 계속되어, 화약 제조 수요가 급증한 제1차 세계대전 때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유럽에서 생산된 합성 초석이 칠레에서 수입하는 천연 초석보다 저렴해지면서 점차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됩니다. 칠레 질산염의 전성기는 1930년대 대공황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더 읽을거리
『칠레, 초석 채굴자들의 발자취를 따라서(Chile. In the footsteps of nitrate miners)』, V. 브루네(V. Brunet), L’Harmattan, 2006.
칠레 부대에 합류한 중국인들
초석 채굴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생산 중심지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함께 사는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았습니다. 산업의 필요에 따라 많은 이민 노동자, 그중에서도 ‘쿨리(coolie)’라고 불린 이들이 대거 고용되었습니다. 이는 1850년에서 1875년 사이 페루로 이주한 약 10만 명의 중국인 이주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들 대부분은 신분증 값을 갚기 위해 구아노 농장에서 거의 노예에 가까운 조건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칠레 해군의 파트리시오 린치(Patricio Lynch)가 페루 연안 원정 당시 이들을 해방시키자, 많은 이들이 칠레 군대에 자원했습니다. 이들은 ‘다이너마이트 장군’으로 알려진 아르투로 비야로엘(Arturo Villarroel)이 이끄는 불카노 부대(Vulcano Legion)의 일원이 되어, 페루군이 설치한 지뢰를 폭파 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