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잭 더 리퍼, 그리고 '정전(正典) 희생자' 다섯 명
1890년, 수사에 깊이 관여했던 멜빌 맥내튼(Melville Macnaghten)이 스코틀랜드 야드 형사수사부(CID) 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잭 더 리퍼가 저지른 살인은 단 다섯 건뿐입니다. 바로 '정전 희생자'라고 불리는 M. A. 니콜스, A. 채프먼, E. 스트라이드, C. 에도우스, M. J. 켈리 다섯 사람입니다. 맥내튼은 몬태규 J. 드루잇, 아론 코스민스키, 마이클 오스트로그 등 세 명의 용의자를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1888년 이후로 근거가 불분명한 추측까지 동원되어 수많은 범인 후보가 거론되어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세기의 미제 사건을 둘러싼 주요 용의자들을 살펴봅니다.
1. 아론 코스민스키(Aaron Kosminski)
범행 당시 형사수사부장을 맡았던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은 범인이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정신 이상을 보이는 하층민 출신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앤더슨은 이 인물을 맥내튼이 언급한 이발사 출신 A. 코스민스키와 동일 인물로 지목했습니다.
2014년에는 코스민스키의 생존 후손과 에도우스가 살해된 현장에서 발견된 숄 사이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일치가 확인되었다는 발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DNA 흔적은 신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숄이 실제로 피해자의 것이라는 증거 자체도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2. 몬태규 J. 드루잇(Montague J. Druitt)
양호한 가문 출신의 변호사였던 드루잇을 맥내튼은 '성적으로 병들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곧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1888년 자신이 교사로 재직하던 기숙학교에서 퇴출당한 이유로 추정됩니다.
그는 켈리 살인 사건 몇 주 뒤 템즈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지만 리퍼 수사를 총괄했던 프레더릭 애버린(Frederick Abberline) 경위에 따르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3. 월터 시커트(Walter Sickert)
<잭 더 리퍼의 침실>(The Bedroom of Jack the Ripper)이라는 작품을 남긴 화가 시커트 역시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인물입니다. 작가 패트리샤 콘웰(Patricia Cornwell)은 그에게서 정신병적 성향을 감지했다며 그를 범인으로 강하게 지목했습니다.
실제로 시커트의 어머니가 쓴 편지와 리퍼가 서명한 편지 사이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일치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유형의 DNA를 당시 인구의 약 10%가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로 삼기에는 역부족인 셈입니다.
4. 존 파이저(John Pizer)
'가죽 앞치마(Leather Apron)'라는 별명으로 불린 유대인 구두공 파이저는 길거리에 나설 때조차 앞치마를 절대 벗지 않던 인물이었습니다. 9월 8일 밤 리퍼의 두 번째 희생자가 된 채프먼 살인 사건 이틀 후, 한 여성이 그날 아침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다고 고발하면서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과거 창녀들을 상대로 폭행을 저지른 전력은 있었지만, 두 건의 살인이 일어난 날밤 모두에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5. 왕실 음모론(The Royal Conspiracy)
1976년, 영국 작가 스티븐 나이트(Stephen Knight)는 <잭 더 리퍼: 최후의 해결>(Jack the Ripper: The Final Solution)을 출간하며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이 왕실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해 철저히 반박된 이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대중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앨버트 공자는 매춘부 사이에서 딸 하나를 얻었고, 그 매춘부의 동료들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모든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왕실은 이들을 제거하기로 하고, 살인 행적을 허구의 인물인 '잭 더 리퍼'에게 돌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왕의 주치의 윌리엄 걸(William Gull)이 살인 현장에 직접 가담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