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국민회의에 대한 두려움
1947년 인도 독립법이 선포되면서 제8조에는 1947년 8월 15일부로 영국 정부가 번왕국(토후국)에 대해 행사해 온 주권이 종료되고, 그 권한이 다시 각 번왕국에 이양된다는 규정이 담겼다. 많은 왕들은 영국이 제공하는 이 특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품었다. 이 규정에 근거하면 각 번왕국은 자유 의지에 따라 인도에 가입하거나 파키스탄에 가입하거나, 아니면 아예 별도의 독립체로 존재할 수도 있었다.
무함마드 알리 지나는 무슬림 연맹 운동을 통해 건설될 미래의 파키스탄에 펀자브 전역과 벵골 전역을 요구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실제 경계선은 파키스탄이 실제로 성립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인도의 왕들 사이에는 '펀자브 전체가 파키스탄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환상이 퍼져 있었다.
그 결과 자이살메르, 비카네르, 알와르, 조드푸르 등 여러 번왕국은 국가가 분할된 뒤 자신의 영토가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국경 사이에 끼이게 되면, 어느 쪽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리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국민회의(콩그레스)는 처음부터 왕들에게 '번왕국에 대한 종주권은 영국 왕실에서 연방 정부로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왕들은 국민회의가 지배하는 인도에 편입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렌드라 만달 회의와 보팔 나와브의 저항
1947년 1월 29일, 봄베이의 타지마할 호텔에서 나렌드라 만달 회의가 개최되었고, 60명의 왕과 100개 번왕국의 장관들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나렌드라 만달 총장인 보팔 나와브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물러서거나 변방에 머물라는 말을 듣고 있다. 이러한 위협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나와브는 또한 번왕국들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기본 원칙들을 하나씩 열거했다. 그는 내각 사절단 계획(Cabinet Mission Plan)이 철저히 준수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트라반코르의 디완(재상)인 C.P. 라마스와미 경은 제헌의회가 번왕국의 정부 형태까지 정하려 든다고 비난했다.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을 통해 왕들은 내각 사절단 계획에 따라 제안된 인도 연합의 헌법 제정 작업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1947년 4월 3일 봄베이에서 열린 나렌드라 만달 회의에서 알와르 국왕은 '번왕국의 통치자들은 힌두 연방 국가에 속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7년 4월 10일, 바로다, 파티알라, 비카네르, 우다이푸르, 자이푸르, 조드푸르, 레와 등이 제헌의회 참여를 선언하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왕들은 제헌의회 밖에 머물러 있었다.
네루의 경고와 리아콰트 알리의 호소
이에 1947년 4월 18일, 자와할랄 네루는 전인도 번왕국 프라자 파리샤드 제8차 회기에서 왕들에게 강경하게 경고했다. 이 시점에 제헌의회에 참여하지 않는 왕들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리아콰트 알리는 왕들에게 네루의 위협에 흔들리지 말라고 호소했다. 네루, 간디, 피야랄랄 등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번왕국을 향해 사용한 강경한 언어 탓에 많은 왕들은 국민회의에 분노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파키스탄에 합류하거나, 독립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번왕국들끼리 별도의 집단을 결성해 가입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종교와 영토가 교차하던 번왕국들의 현실
독립 당시 인도의 대다수 번왕국은 힌두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하이데라바드, 보팔, 주나가드, 톤크의 통치자는 무슬림이었지만 그곳 주민의 절대 다수는 힌두였다. 반면 카슈미르의 왕은 힌두였지만 백성의 다수는 무슬림이었다. 이처럼 인도의 번왕국과 그 백성들은 영령 인도의 힌두 다수 지역과 민족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독립 당시 인도에는 총 566개의 번왕국이 존재했다. 그중 12개 번왕국, 즉 바하왈푸르, 카이르푸르, 칼라트, 라스벨라, 마크란, 카란, 암(타나왈), 치트랄, 훈자, 디르, 나가르, 스와트는 파키스탄 영토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파키스탄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554개 번왕국은 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슬림 통치자가 다스리던 주나가드(사우라슈트라), 하이데라바드(남인도), 보팔(중앙 인도)과, 힌두 통치자 아래 무슬림이 다수였던 카슈미르는 인도 합류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부 힌두 번왕국들 역시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칼라트 침공, 파키스탄의 진짜 색깔
파키스탄 영토 안에 위치한 번왕국 칼라트는 파키스탄 가입을 거부했다. 지나는 당시에는 침묵을 지켰지만, 1948년 3월 파키스탄군이 칼라트를 무력 침공해 강제로 파키스탄 영토에 병합해 버렸다. '자율적 선택권'을 내세웠던 파키스탄의 논리가 실제로는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독립을 꿈꾸던 대형 번왕국들과 사둘 싱의 돌파구
소규모 번왕국들은 인도 연합과 합병하는 것 외에 뚜렷한 선택지가 없었지만, 규모와 역량을 갖춘 대형 번왕국의 상황은 달랐다. 트라반코르, 하이데라바드, 잠무 카슈미르, 마이소르, 인도르, 보팔, 나바나가르, 심지어 왜소한 번왕국이었던 빌라스푸르까지 완전한 독립을 꿈꿨다. 보팔 나와브는 나렌드라 만달 총장이라는 직위를 남용해 중앙에 강력한 연합 국가가 수립되는 것 자체를 막으려 했다.
바로 이런 국면에서 비카네르의 사둘 싱 국왕이 전국 정치 무대에 나서 왕들을 이끌며, 나와브가 설치한 거대한 포위망을 깨뜨렸다. 1947년 4월 10일, 바로다, 파티알라, 비카네르, 우다이푸르, 자이푸르, 조드푸르, 레와 등 핵심 번왕국들이 제헌의회 참여를 선언하면서 나와브의 계획은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더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 종주권이 즉시 종료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영령 인도의 주권 종료일과 번왕국 인도의 종주권 종료일이 동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립의 문턱에 선 라자스탄의 번왕국들은 나라의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라자스탄의 왕들은 이 시기 자신들이 '인도 입헌 발전의 적'으로 비난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독립 선언의 도미노와 마운트배튼·파텔의 거래
1947년 6월 5일, 보팔과 트라반코르는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결정을 공식 발표했다. 하이데라바드도 같은 생각이었다. 카슈미르, 인도르, 조드푸르, 돌푸르, 바라트푸르 등 일부 번왕국들도 유사한 선언에 동참할 가능성이 컸다. 이처럼 일부 번왕국 통치자들의 야망은 곧 신생 국가 인도의 영토 통합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당시 마드라스 총독이었고 훗날 독립 인도에 파견된 초대 영국 고등판무관이 된 아치볼드 나이 경은 번왕국과의 어떠한 조약에도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마운트배튼은 사르다르 파텔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왕들의 작위를 빼앗지 않고, 궁전은 그들에게 그대로 남겨주며, 체포 걱정에서 자유롭게 하고, 사금(私金, privy purse) 혜택도 계속 유지하며, 부왕이 수여한 어떤 영예도 받는 것을 막지 않겠다면, 내가 왕들을 설득해 그들의 국가를 인도 연합에 병합하고 독립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하겠다.'
파텔은 마운트배튼에게 조건을 붙였다.
'마운트배튼 경이 모든 번왕국을 인도의 품으로 데려온다면, 나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예언된 좌초, 그리고 역사의 판결
저명한 지식인 테즈 바하두르 사프루는 이렇게 평했다.
'나는 그 번왕국들이, 크든 작든, 이런 식으로 독립을 이룬 뒤에도 그 독립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큼 어리석다는 사실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
한편 비운의 예언자들은 이렇게 경고했다.
'인도의 자유라는 배는 번왕국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