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기욤 드 노가레: 교황을 사로잡고 성전기사단을 무너뜨린 필리프 4세의 법률가

기욤 드 노가레: 교황을 사로잡고 성전기사단을 무너뜨린 필리프 4세의 법률가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313)는 툴루즈 인근 생펠릭스드카라망(Saint-Félix-de-Caraman) 출신의 프랑스 왕국 법률가이자 정치가다. 몽펠리에에서 법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보케르·님 관구의 왕실 판사를 겸임했던 그는 프랑스 왕관에 대한 남다른 충성심으로 여러 차례 두각을 나타냈다.

필리프 4세의 측근으로 부상하다

1296년, 노가레는 대법관 피에르 플로트(Pierre Flotte)의 발탁으로 국왕 평의회에 들어섰다. 같은 해 그는 샹파뉴 지방에서 진행한 교회 면책 특권에 대한 조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실력을 입증했다. 이후 그는 미남왕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의 측근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자문관 중 한 명으로 빠르게 올라섰다.

1298년에는 파리 고등법원(parlement)에 참석했고, 1300년에는 왕실 기사(Hôtel du Roi)에 임명되었다. 재정과 행정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그는 국왕의 깊은 신뢰를 받는 심복으로 자리매김했다.

보니파시오 8세와의 충돌, 아냐니 사건

그러나 노가레의 이름을 역사에 새긴 것은 무엇보다 14세기 초,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e VIII)와 국왕 사이의 갈등에서 수행한 결정적 역할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카타리파(Cathar) 혐의로 화형당한 바 있었는데, 이 비극적 최후가 법률가인 그가 교황에게 품은 증오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00년부터 필리프 4세는 그를 로마의 보니파시오 곁에 파견해 교황을 자극하고 갈등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1303년 3월 12일, 왕국 귀족들의 회합 앞에서 노가레는 보니파시오 8세를 온갖 죄상으로 고발하고 '범죄자'라고 지목하며, 일반 공의회의 심판을 받기 전까지 구금할 것을 제안했다. 소식을 접한 교황은 국왕 파문으로 맞서겠다고 위협한 뒤 아냐니(Anagni)로 피신했다.

노가레는 교황을 강제로 리옹의 공의회에 세우기 위해 납치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은 보니파시오의 숙적인 콜론나 가문(Colonna)의 지원 아래 준비되었다. 1303년 9월 7일, 노가레는 스키아라 콜론나(Sciarra Colonna)와 무장 병력 300명을 이끌고 아냐니를 무력으로 진입했다. 그는 콜론나가 교황을 해치려는 것을 막은 뒤 교황을 구금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냐니 주민들이 봉기하고, 추기경들이 불러들인 로마 기병대의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납치범들은 도주했고 교황은 석방되었다. 불운한 교황은 그해 10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면죄, 그리고 새로운 임무

후임 교황 베네딕토 11세(Benedict XI)는 1304년 납치 사건의 모든 가담자를 사면했으나, 오직 노가레만은 출두를 요구하며 배제했다. 그러나 새 교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프랑스 출신 후계자 클레멘스 5세(Clement V)는 결국 성지 순례를 서약하는 조건으로 그를 사면했다. 물론 그 순례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유대인 재산 몰수와 성전기사단 탄압

1306년, 필리프 4세는 노가레에게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장 드 생쥐스탕(Jean de Saint-Just)과 함께 툴루즈 관구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류한 뒤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를 마치자마자 노가레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그리고 오랫동안 국왕에게 권고해 온 자신의 의견에 따라 성전기사단(Templars) 탄압에 착수했다. 그는 기사단의 몰락과 해체가 완성될 때까지 밀어붙였다.

어떤 이들은 전적으로 조작된 혐의라고 보고, 어떤 이들은 실재하는 근거가 있었다고 평가하는 고발을 바탕으로, 1307년 9월 국새(garde des sceaux)를 위임받은 노가레는 성전기사단 재판을 조직했다. 10월에 대거 체포된 기사단원들을 상대로 그는 국왕을 설득해 심문을 종교재판관들과 주교들에게 맡겼다. 1308년에는 피고들이 무죄일 수 있다고 판단해 수사를 중단하려던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후 몇 년간 노가레는 고문에 못 이겨 모든 것을 자백했지만 때로는 이를 번복하던 성전기사단원들이 화형대에 오르는 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1313년 4월 그가 숨을 거둘 당시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 단장과 기사단의 세 고위 인사는 아직 감옥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