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길 무렵, 그의 어머니는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의 예수 무덤 근처에 웅장한 성당을 세웠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했지만 동방 제국에서는 그리스어가 통용되었고, 두 지역의 문화 역시 크게 달랐습니다.
로마 문화는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여겨 비잔틴 지역의 문화를 억누르려 했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무슬림 세계에서 '룸(Rûm)', 곧 '로마'로 불렸으며, 이 명칭은 수백 년간 통용되어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 땅을 '룸' 혹은 '로마니아'라고 부릅니다. 새 수도는 유럽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해 아시아 대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로마의 위상 저하
수도의 이동과 함께 세계의 정치·종교 지도도 바뀌었습니다. 낡은 로마와 그 고대 종교는 사실상 중요성을 잃었고, 그 자리를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새로운 기독교가 대신했습니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의 교역 물품 대부분이 이 길목을 거쳐갔기 때문에 새 수도는 막대한 세금을 거두며 부유해졌습니다. 반면 가장 큰 약점은 로마, 갈리아, 브리튼 등 유럽의 주요 도시들이 새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분열
제국을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각각 군주를 두고 전체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는 체제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의 군주는 '황제', 로마의 군주는 '공동 황제'라 불렸습니다. 서기 395년, 공동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를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분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은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 두 부분으로 갈라졌습니다. 서기 395년부터 480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서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을 명목상 인정해 주었습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의 네 번째 후계자인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버리고 고대 로마의 다신교, 즉 신상을 숭배하는 이교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옛 종교로 되돌리는 데는 실패했는데, 그 무렵 기독교는 이미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황제를 '배교자(카피르) 율리아누스'라 불렀고, 그는 오늘날까지도 역사 속에서 이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
율리아누스 이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동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 종교를 깊이 미워하여 고대 신들의 우상과 신전을 대거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를 '대제'라 불렀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비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독실하지 못해 보이는 기독교인들까지 처벌하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는 동·서 로마 제국을 다시 하나로 통합했지만, 서기 395년에는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법전
서기 52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동로마 제국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지역과 이탈리아 등 고대 로마의 옛 영토, 그리고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의 일부를 정복했습니다. 그는 고트족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한동안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제국에 병합했지만, 이후 고트족이 다시 이탈리아를 장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 역시 동로마 제국의 손을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아름다운 성 소피아 대성당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당시 시행되던 모든 로마법을 한곳에 모아, 능숙한 법률가들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 of Justinian)'입니다.
이 법전은 훗날 근대 유럽 법의 주요 원천이 되었습니다. 다만 로마법은 가부장(pater familias)에게 가족 재산과 노예에 대한 거의 무제한의 권한(patria potestas)을 부여했습니다. 가부장은 모든 재산과 노예의 주인이었고, 아내와 딸은 재산이나 노예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지 못했습니다. 딸은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권위 아래 들어갔습니다. 노예 계급에게는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단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는 마누 법전의 기본 개념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마누 법전에서는 아들이 공동 가족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고, 여성의 재산을 인정하는 제도도 있었으며, 종에게도 일정한 재산권이 주어졌습니다. 마누에 따르면 모든 시민은 평등했습니다.
시민 권리에서 이런 차이가 난 것은, 로마법이 현자나 학자가 아니라 황제에 의해 만들어진 반면 마누의 법학은 현자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플라톤이 천 년 전에 세운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학당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 교리에 기반한 새로운 학문 중심을 세웠습니다. 놀랍게도 이 시기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로마의 사상에서 멀어져 그리스적 사상 제국의 일부가 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기독교 철학 앞에서 천 년 된 그리스 철학과의 연을 끊고 새로운 질서로 빠르게 이행해 가고 있었습니다.
권력을 향한 탐욕, 왕가의 음모
콘스탄티노플의 왕실에서는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깊은 음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기 780년, 황제 레오 4세의 아홉 살 난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가 동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레네는 서기 790년까지 섭정으로서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이레네는 아테네 출신의 공주였고 콘스탄티누스 6세는 그녀의 외아들이었지만, 이레네는 권력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황제가 26세가 되던 해인 서기 797년, 친아들을 붙잡아 감금하고 눈을 멀게 했습니다. 황제는 눈의 상처로 며칠 안에 세상을 떠났고,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플의 여제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친아들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경우는 세계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로 꼽힙니다. 그러나 결국 이 여제 자신도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이후 700년간 더 이어졌습니다. 다만 우리의 중심 주제가 로마인 만큼, 동로마 제국의 이야기는 여기서 간략히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