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는 탄생 이래 끊임없는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훌륭한 제도, 가장 위대한 사상, 가장 완성된 창조물이나 체계라 할지라도, 그 정교함은 갈등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떤 대상과 관련해 일어나는 사상은, 그 자체로 더 이상 다듬을 여지가 없을 만큼 완벽하지 않다.
예수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님의 아이라고 칭했을 뿐, 결코 신성(神性)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빌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를 신이라 선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신성을 부여하려는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감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이 죽어야 비로소 그 위대함을 깨닫곤 하는데, 바로 그러한 감정 때문에 많은 이가 그제야 예수의 위대함을 알아보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에게 신격(神格)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층에 새로운 도전이 되기를 바랐다. 양심의 순수한 감정에서 출발해 예수 안에서 신성을 보았던 이들도 있었고,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데 열을 올리던 이들도 있었다.
생전의 예수가 신적인 자질을 지녔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형 이후 불과 수백 년 사이에 수백만 명이 예수의 신성을 믿게 되었다. 이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넘어, 하나님 대신 예송받는 존재로 격상되고 말았다.
삼위일체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분쟁
기원후 4세기 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한때 박해받던 기독교는 더 이상 평민의 종교가 아니었다. 국가의 보호라는 영광에 힘입어, 이제야말로 기독교 설교자들이 적대 세력을 척결할 때가 온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는 새로운 갈등에 휘말리고 말았다. 설교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대신,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의를 두고 논쟁에 빠져버린 것이다.
기독교에서 아버지(성부), 아들(성자), 성령을 묶어 삼위일체(Trinity)라 부른다. 이 문제를 놓고 각파가 갈라져 서로를 이단이라 규정하고, 상대에게 박해를 가했으며, 심지어 목숨을 빼앗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때 일부 기독교 분파들 사이에서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단어의 해석을 두고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공동체는 기도 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본질이 같음)', 즉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공동체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본질이 유사함)', 즉 예수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맞섰다. 이 논쟁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다뤄졌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양측은 무력 충돌까지 벌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동서 분열
설교자들의 내분은 너무도 심각해서, 기독교가 로마 황제의 종교가 된 뒤에도 그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로마 황제가 로마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자, 양 도시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누가 더 크고 참된 기독교인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동체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공동체는 스스로를 그리스 계열(동방 교회)이라 칭했고,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는 라틴 계열(서방 교회)이라 자칭했다.
로마 교회는 카톨릭(공교회) 교회라 불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정교회(Orthodox Church)라 불리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교는 라틴 계열 기독교 공동체의 수장이 되었으며, 훗날 성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명분으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배타적 의식은 극에 달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교는 '교황(Pope)', 곧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이는 놀라운 상황이었다. 주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의 후계자가, 온 세계 기독교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로마에 황제가 없게 된 뒤로는 교황의 지위가 날로 높아져 갔다.
암흑시대와 고대 문화유산의 파괴
6세기경에도 기독교의 전쟁은 비기독교인이 아니라 다른 기독교 분파와의 싸움이었다. 이 분파들은 서로에게 극도로 불관용했다. 북아프리카 전역과 서아시아, 유럽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은 주먹과 몽둥이, 검으로 자기 형제들에게 종교의 본질을 '설명'하려 들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는 투르키스탄, 중국, 아비시니아(하브시, 오늘날 에티오피아)까지 전파되었으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였다.
유럽에서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책들을 샅샅이 찾아내 파괴했다. 그 책들 속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고대 로마 종교, 고대 신들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고대의 회화, 조각, 음악 예술 역시 그 시대 기독교인들의 손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색출되어 파괴되었다. 그 유물들이 틀림없이 고대 로마의 신들과 여신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성직자가 그렇게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사제들은 과거를 조상들이 물려준 소중한 유산으로 여겼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 수도원과 교회, 암자에서는 오래된 책들이 몰래 보관되어 파괴의 위기에서 구원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부 고대 회화들도 이렇게 해서 보존될 수 있었다.
사막으로 떠난 고행 수행자들
이 시기에 일부 기독교 은둔 수행자들은 인간 사회를 떠나 사막 지대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친 자연 속에서 살며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했다. 목욕을 하지 않았고, 가능한 한 많은 괴로움을 겪으려 애썼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이집트에서 두드러졌는데, 수많은 수행자들이 사막에서 이런 삶을 살았다. 그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이 클수록, 목욕과 씻음을 멀리할수록, 그들은 더욱 정결해진다.'
한 수행자는 수년 동안 기둥 위에 앉아 지냈다. 실제로 5세기 시리아의 수도자 시메온 스틸리테스는 30년 넘게 기둥 위에서 산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든 채 버텼고, 그 팔은 굳어서 쓸모없게 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쇠못 위에 앉아 고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런 수행자들의 삶의 방식은 인도의 하타 요가 수행자들과 매우 흡사했다.
점차 이 기독교 수행자들의 전통은 사라졌지만, 오랫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믿었다.
'기뻐하는 것은 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