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월 19일이었다. 자바의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계산해 보니 발리섬은 새벽 3시, 인도에서는 한밤중 12시였다. 참으로 신기한 몸이 아닐 수 없다. 몸속의 생체시계는 저절로 현지 시간에 맞춰 조절된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온 세상을 알고 싶어 애쓰는 우리는 정작 우리 몸이 지닌 능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다른 가족들도 정확히 5시에 일어났다. 마치 아직 인도에 있는 것처럼, 딱 기상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안토 씨와 함께 시작되는 하루
우리는 안토 씨와 아침 9시에 만나기로 했고, 그는 약속 시간에 맞춰 차를 몰고 왔다. 하늘은 맑았고, 해가 쨍하게 뜨지 않아 날씨도 쾌적했다. 아침 식사는 이미 마쳤고 점심도 준비해 왔기 때문에 출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보로부두르 불교 사원이었지만, 그곳에 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인도네시아 화폐가 바닥났기 때문에 믿을 만한 환전소에서 달러를 루피아로 바꿔야 했다. 달러를 한꺼번에 바꾸지 않은 이유는, 인도네시아를 떠날 때 남은 루피아를 다시 달러로 환전하며 수수료를 치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기차역에 들러 내일 기차 여행의 승차권을 발급받는 것이었다. 비제이가 뉴델리에서 이 기차를 온라인으로 예약해 두었고 그 출력본을 갖고 있었지만, 탑승 전에 반드시 실제 승차권을 받아야 했다.
환전소에서의 5분
안토 씨는 우리를 중부 자바 잘란 말리오 지역의 5성급 호텔로 안내했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평판 좋은 환전소 사무실이 있었다. 우리는 필요한 만큼만 달러를 바꿨다. 창구마다 스물둘 살쯤 된 젊은 여성들이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의 환전을 처리하고 있었다. 창구 직원은 간단한 신청서 작성과 여권 제시를 요청했다. 1달러당 루피아가 얼마인지 묻자, 그녀는 당일 국제 환율이 표시된 전자 게시판을 가리켰다. 우리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달러를 건넸다. 직원은 금액을 계산해 종이에 적어 보여주었다. 완전히 정착된 절차였고 어디에도 숨김이 없었다. 행동 하나하나 부드러웠고 말은 간결했다. 신청서와 여권을 대조한 뒤 금액이 지급되기까지, 이 모든 과정에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잘란 말리오 거리 풍경
환전을 마치고 우리는 잘란 말리오를 잠시 걷기로 했다. 자바어로 '잘란(Jalan)'은 거리를 뜻하고, '말리오'는 말리오 성씨를 가진 자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자바 인구 중 약 550만 명이 이 성씨를 쓴다고 하니, 이 거리는 그중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딴 것이리라. 중부 자바 주의 잘란 말리오는 뉴델리의 콘노트 플레이스처럼 활기 넘치는 번화가다. 반짝이는 쇼핑몰이 늘어서 있고 외국인 관광객이 끊이지 않으며, 넓은 도로 양옆에 늘어선 4성급·5성급 호텔의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렵다. 거리 곳곳에서 '베착'과 '도카르'라 불리는 차량이 수없이 오가며, 그 위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겁게 관광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투구 역(Yogyakarta Station)
안토 씨는 우리를 잘란 말리오에서 요그야카르타 시의 투구 기차역으로 데려갔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역은 현재 '요그야카르타 역'이라 불리지만, 옛 이름은 '투구 역'이며 지금도 현지인들 사이에는 이 이름이 널리 통용된다. 참고로 자바에서는 역을 '스타시온(stasion)'이라고 발음한다.
역 본관 외벽에는 로마자로 된 크고 노란빛의 'Jogjakarta' 글자만 새겨져 있었다. 이 일대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자바의 유명한 중심지로, 주요 네덜란드 관료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했다. 요그야카르타의 술탄도 그 시절 바타비아와 투구 역 사이를 오가며 이동했다고 한다. 2000년에 이 역은 현대화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이름도 '투구'에서 '요그야카르타'로 바뀌었다. 이로 미루어 '투구'라는 단어는 식민지 시대 네덜란드 통치자들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비제이와 나는 유리 집무실에 앉아 있던 철도 공무원에게 승차권을 어디서 발급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공무원은 밖에 있는 무인 발매기에서 출력하라고 했다. 그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억양이 마치 자바 고유의 언어를 구사하는 듯해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비제이는 대체 어떻게 그 의도를 알아들은 걸까!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무인 발매기는 완전 자동 방식이었다. 비제이가 온라인 예약 출력물의 바코드를 스캐너 앞에 대는 순간, 우리의 승차권이 쏙 나왔다. 이 일이 내 몫이었다면 여러 사람의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방법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대 차이였다. 바코드를 읽어 처리하는 첨단 기기를 다루는 일은 우리 세대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첨단 시설을 갖춘 나라, 인도네시아
여행 내내 여러 번 실감했지만, 인도네시아는 가난한 나라이자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상점, 사원, 정부 청사, 역, 기차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최신식 컴퓨터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고, 젊은 여성 직원들이 그것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인도는 아직 이런 시설 면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꼼꼼한 청결 관리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도시부터 시골 마을까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인도가 이 수준의 청결에 도달하려면 아마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어디에도 소란스러운 인파와 소음이 없었는데, 이런 시민 의식은 부러움을 자아낼 만했다.
무슬림 국가임에도 인도네시아의 여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상업 시설, 공공장소, 정부 부처에서 자유롭게 일하고 있었다. 어떤 여성도 부르카를 입지 않았고, 머리와 귀만 가리는데 그조차 의무가 아니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도 여럿 보였다. 모두 자신의 업무에 능숙했고, 직원들끼리 말다툼하거나 근무 중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장소에 복장 규정이 적용되었고 모든 여성들이 이를 잘 지켰다.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예배 소리를 제외하면 낮이든 밤이든 거리에서 들리는 소음은 없었다.
길가에서의 과일 쇼핑
기차역을 떠나 차에 오르자 아버지께서 길가 가게에서 과일을 좀 사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안토 씨에게 과일을 살 수 있는 곳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안토 씨는 차를 몰고 가면서도 세울 만한 곳을 쉽게 찾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의 교통 규칙은 매우 엄격해서, 이를 어기면 운전자나 시민 모두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중부 자바를 벗어나 시골길에 접어들었고, 마침내 작은 매점 같은 가게 앞에서 안토 씨가 차를 멈췄다. 그는 시내의 과일 가게 앞에 세워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우리는 그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며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곳은 여러 종류의 과일이 진열된 작은 가게였다. 반짝이는 대형 쇼핑몰에 넘쳐나는 값비싼 수입 과일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 자라난 토착 과일들이었다. 그중에는 작고 노란 빛깔의 바나나가 있었는데, 단맛이 적고 먹을 때 신맛이 강한 품종이었다. 우리는 그 바나나를 골랐다. 또한 작은 리치처럼 송이로 묶인 갈색 과일도 있었는데, 자바의 토종 리치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닮았으나 과육과 즙, 향이 적었다. 오렌지의 크기도 매우 작았고, 사과는 분명 수입품이었지만 역시 작았다.
과일 장수는 영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가게에 외국인이 찾아온 것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마을에서 자기 가게의 과일을 외국인에게 판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장수는 알지 못했겠지만, 우리는 이미 인도네시아에서 쇼핑하는 요령을 터득한 뒤였다. 그래서 여러 과일을 소량씩 골고루 구매했다. 상인은 깜짝 놀랐다. 자기 언어조차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성공적으로 장사를 마쳤으니,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곴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주머니에 인도네시아 돈이 들어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워했다.
과일을 모두 산 우리는 다시 안토 씨의 차에 올랐고, 차는 보로부두르 사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번 놀랐다. 동네 과일 가게 주변에는 버려진 쓰레기나 과일 껍질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