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이탈리아 통일(리소르지멘토): 근대 이탈리아 민족국가의 탄생

이탈리아 통일(Risorgimento, 리소르지멘토)은 19세기 중후반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주도로 진행된 영토 통합 과정으로, 그 결과 오늘날의 근대 민족국가 이탈리아가 탄생했습니다. 이 위업은 사보이아 가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과 그의 총리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이 이끌었습니다.

19세기, 분열된 이탈리아

19세기 전반기의 이탈리아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과 공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중 상당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내내 강화된 민족주의 이념, 특히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자유주의 혁명은 이탈리아인들에게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통일을 바라보던 세 가지 노선

강화된 민족주의는 다양한 통일 운동의 등장으로 이어졌으며, 각 세력은 통일의 방식에 대해 서로 다른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 신구엘프파(Neoguelfi): 빈첸초 조베르티가 이끈 세력으로, 교황권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공화파: 주세페 마치니가 이끈 세력으로, 공화주의 이념에 입각한 통일을 추구했습니다.
  • 군주파: 사보이아 가문의 주도 아래 군주제 국가로서 통일을 이루자는 입장이었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카보우르 백작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848년 혁명과 공화파의 좌절

1848년의 격변은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공화파가 주도하는 봉기를 촉발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공화파 단체 '젊은 이탈리아(Young Italy)'의 지도자 주세페 마치니는 권력 장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공화파 운동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다음 해인 1849년,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피에몬테-사르데냐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1852년에는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을 총리로 임명했고, 두 사람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하게 됩니다.

카보우르의 외교와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이탈리아인들은 이 통일 과정을 '리소르지멘토', 즉 '재흥'이라고 부릅니다. 통일은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이 주도했으며, 카보우르 백작은 먼저 왕국의 근대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는 또한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오스트리아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지원을 확보했습니다. 1859년, 프랑스와 피에몬테-사르데냐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와 맞서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을 치렀습니다. 승리한 피에몬테-사르데냐는 롬바르디아 왕국을 병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패배 이후, 다른 이탈리아 왕국들도 차례로 봉기하여 오스트리아 통치자들을 축출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에 합류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승리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마치니, 가리발디 같은 영향력 있는 공화파 인사들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리발디의 남부 원정과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

공화파가 피에몬테의 통일 운동을 지지하게 된 것은 1848년 봉기 실패 이후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렵 주세페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남부의 양시칠리아왕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역을 정복한 뒤, 그 땅을 피에몬테에 넘겼습니다.

점령지가 늘어나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61년 스스로를 온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선언했습니다. 이후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편에 선 덕분에 베네토 지역도 손에 넣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군이 교황령에서 철수하자 이탈리아는 로마를 침공해 정복했습니다.

교황과의 갈등, 그리고 라테란 조약

교황령에 대한 침공은 가톨릭 교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교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갈등은 1929년에야 해소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와 베니토 무솔리니 사이에 체결된 라테란 조약은 바티칸 시국의 건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한편 이탈리아 영토에 마지막 지역들이 병합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