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의 섬, 수마트라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수마트라 섬은 '스바르나디프(Swarnadeep)'와 '스바르나부미(Swarnabhoomi)', 즉 '황금의 땅'으로 불렸습니다. 이는 이 섬 상류 지역에 막대한 금광 매장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원후 4세기경 인도 출신 왕들이 수마트라에 왕국을 세웠으며,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1017년 수마트라 스리비자야 왕조의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아랍 지리학자들은 이 섬을 '람리(Lamri)' 또는 '라무리(Lamuri)'라고 지칭했습니다. 13세기에는 마르코 폴로가 이 섬을 '사마라(Samara)' 혹은 '사마르차'라고 불렀고, 14세기에는 이탈리아 출신 여행자 오도리쿠스 데 포르데노네가 이곳의 바다를 '수몰트라(Sumoltra)'라고 언급했습니다. 이후 유럽 문인들이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수마트라'라는 이름이 굳어졌습니다.
삼드라파시에서 아체 술탄국으로
14세기 말, 수마트라에는 '삼드라파시(Samudra Pasi, '바다 근처'라는 뜻)'라는 왕국이 건립되었습니다. 이 '삼드라파시'가 훗날 '수마트라'로 불리게 된 연원입니다. 이후 이 나라는 무슬림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아체 술탄국(Aceh Sultanate)이 세워졌습니다. 아체의 술탄 알라우딘 샤는 1602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아체와 삼드라의 술탄"이라 소개했습니다.
불교 왕조 스리비자야의 전성기
믈라유(Melayu) 왕국은 스리비자야 왕조의 왕들에 의해 정복당했습니다. 스리비자야 왕조는 불교를 숭상한 왕조로, 팔렘방(Palembang) 인근을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수마트라의 왕들은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인도네시아 제도 전역에 말레이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스리비자야 제국의 백성들은 해상 무역을 통해 여러 섬나라들과 활발히 교역했습니다.
스리비자야 시대의 팔렘방은 학문과 교육의 선진 중심지였으며, 중국의 불교 승려들이 순례를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중국 불교 승려 의정(Yijing)은 671년 인도로 향하기 전 수마트라에서 산스크리트를 공부했으며, 인도 순례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수마트라에 머물며 많은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습니다.
쇠퇴와 이슬람의 유입
11세기, 남인도 촐라(Chola) 왕조의 공격으로 스리비자야 왕조는 크게 약화되었고, 이것이 이슬람이 수마트라에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만 아라비아와 인도 출신 무슬림 상인들은 이미 6~7세기부터 무역을 위해 수마트라를 찾고 있었습니다. 13세기 말, 삼드라의 힌두 왕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스리비자야를 대신해 아체 술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1292년, 이븐 바투타는 1345~46년에 수마트라 섬을 방문하여 아체 술탄국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아체 술탄국은 20세기까지 존속했으며, 수마트라 섬의 여러 국가들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주권을 상실한 후에도 아체 술탄국은 1873년부터 1903년까지 끈질기게 네덜란드에 맞서 싸웠습니다.
식민지 시대와 인도네시아 독립
1903년 아체 술탄국이 붕괴하면서 수마트라 섬 전체가 네덜란드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이후 수마트라는 네덜란드를 위한 후추, 고무, 석유의 주요 생산지가 되었습니다. 수마트라 출신의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들이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중 모하마드 하타(Mohamed Hatta)와 수탄 샤리르(Sutan Sjahrir)가 대표적입니다. 모하마드 하타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수탄 샤리르는 초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갈등과 남겨진 유산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인도네시아 정부에 맞서 독립 아체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분쟁 과정에서 2001년과 2002년에만 수마트라 섬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한편 북수마트라에서는 일곱 개의 힌두 사원이 발굴되었으며, 이 유적들에서 인도 사원 건축 양식과 종교, 철학의 영향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