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피의 강물을 건너 탄생한 파키스탄 (4): 길 위에서 죽어간 난민 행렬

피의 강물을 건너 탄생한 파키스탄 (4): 길 위에서 죽어간 난민 행렬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행렬

앳킨스 대위와 그가 이끄는 구르카 병사들은 수주 동안 난민 행렬의 호위 임무를 맡았다. 힌두교도들의 행렬은 인도로, 무슬림들의 행렬은 파키스탄을 향해 걸었다. 난민들은 출발할 때는 기뻐 보였지만, 길이 멀어질수록 배고픔과 갈증, 피로에 지쳐 갔다. 뙤약볕을 견디지 못한 그들은 이 긴 여정이 과연 끝나기나 할 것인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가장 작은 짐마저 무겁게 느껴지면서 그들은 하나둘 짐을 내던졌다. 마침내 목적지에 닿았을 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불행한 이들은 긴 여정을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노인과 환자, 어린이들은 빠르게 지쳤다. 아이를 안고 걸어갈 힘이 바닥난 부모들은 길가에 자식을 두고 스스로 행렬을 따라 떠나야만 했다.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과 열린 무덤이 된 도로

버려진 아이들은 배고픔과 갈증 속에 숨을 거두었다. 도중에 늙은이가 문득 행렬을 이탈하기도 했다. 그들은 길 근처의 그늘을 찾아 그 평온함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의 마지막을 조용히 기다렸다. 행렬을 호위하던 군인들은 차량 안에서 임산부의 분만을 도와야 하기도 했다. 산모는 출산 직후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인도 혹은 파키스탄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겨야 했다.

행렬이 남기고 간 시체의 참상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행렬이 라호르와 암리차르 사이 약 72킬로미터 길을 오갔다. 그 도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열린 무덤으로 변했다. 길 위에는 처참한 악취가 감돌았다. 독수리들은 시체를 너무 많이 삼켜 몸이 무거워져 날개짓조차 할 수 없었다. 들개들은 그 고기 맛에 길들여져 시체의 간만 먹고는 나머지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딸은 살려두지 못했습니다"

인도 분할 당시 동펀자브에서 비카네르로 피신했던 카일라시 베르마 부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사람들은 젖먹이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은 마음을 끝내 접지 못했지만, 배고픔과 병, 지친 몸 때문에 아이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아들을 품에서 내려 길가에 살려 두었다. 신이 그 아이의 운명에 생명을 적어 두었다면 살아남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딸은 달랐다. 딸은 땅에 눕혀진 채 발로 목을 짓눌려 질식사했다. 자라서 매춘에 몸을 팔아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이유였다.

가장 잔혹했던 시크교도들의 습격

래리 콜린스와 도미니크 라피에르는 시크교도들의 습격이 가장 끔찍했다고 기록했다. 그들의 무리는 사탕수수밭과 밀밭에서 격렬한 함성과 함께 갑자기 뛰쳐나와 행렬 중 경비가 가장 허술한 부분을 덮쳤다. 행렬에서 뒤처져 비틀거리며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무자비한 칼날이 휘둘렸다.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행렬이 같은 길 위에서 마주치며 교차하는 일도 잦았다. 그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증오의 불길에 타오른 그들은 서로를 향해 폭발하듯 화를 내며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이런 충돌 속에서 목숨을 잃는 이도 있었다. 반면 서로 엇갈려 지나가던 무슬림이 힌두교도에게, 힌두교도가 무슬림에게 자신들이 떠나온 마을의 이름을 일러주며 그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기도 했다.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의 죽음

여러 추산에 따르면 이 폭동으로 약 5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천200만 명이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 전국 곳곳에서 소요와 방화, 여성 납치와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G.D. 코슬라 판사는 저서 『Stern Reckoning』에서 펀자브, 북서 변경주, 신드, 벵골 등지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를 선명하게 그려냈다. 과도정부에 참여한 인도국민회의 지도자들은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 학살과 재난을 연구하는 핵심 학자로 꼽히는 코슬라의 추산에 따르면, 1946년 8월 16일부터 1947년 말까지 무려 백만 명이 살해되었다. 영국의 양대 석학인 펜들 문(Penderel Moon)과 H.V. 허드슨은 각각 20만 명과 25만 명으로 사망자 수를 추산했다. 난민 행렬은 1천500만 명의 대이동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벵골 변방은 상대적으로 잔잔한 편이었지만, 이곳에서도 백만 명이 좌우로 오가며 난민이 되었다. 이러한 참화로 인해 인도의 저명한 지도자들과 마지막 부왕은 전 세계로부터 혹독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단 5만 5천 명 병력에 불과한 펀자브 경계군으로는 폭동을 통제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역사가들은 이 부대를 창설한 마운트배튼 경과 그의 참모들의 안이한 판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펀자브의 폭동은 아무리 참혹했다 해도 결국 인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펀자브 이외의 주로 확산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