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등장과 대중 동원
벵골 분할(1905년) 이후 인도 국민회의(Congress) 내부에서 극단파(Extremists) 지도자들이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온건파의 청원·호소 정책을 거부하고, 영국 제국과의 협력 노선도 배격했다. 그들의 목표는 인도인의 '스와라지(Swaraj, 자치)' 획득이었으며, 이를 위해 전국적 대중 운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일반 민중에게 불굴의 애국심과 희생 정신을 심어 영국 식민 정부를 공포로 몰아내려 했다. 이를 위해 외제품 불매운동(스와데시), 토산품 장려, 민족 교육 강화를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종교·사회 의식을 통한 민족 통합
당시 인도의 부유층·지식인·중산층이 서구 교육과 생활양식에 매료되어 있을 때, 극단파 지도자들은 인도 고유의 문화·정신적 우월성을 부각해 민족주의 정서를 불어넣고자 했다. 발 강가다르 틸락(Bal Gangadhar Tilak)은 마하라슈트라에서 가네시 푸자(Ganesh Puja)와 시바지 축제(Shivaji Utsav)를 대중적 행사로 정착시켰고, 아우로빈도 고쉬(Aurobindo Ghose)는 벵골에서 한 달간의 칼리 푸자(Kali Puja)를, 랄라 라즈파트 라이(Lala Lajpat Rai)는 펀자브에서 아리야 사마지(Arya Samaj) 운동을 강화했다. 이들 종교·사회 의식은 민족 단결과 사회적 각성의 효과적 매개체가 되었다.
영국의 분열 책동과 이민족주의(Two-Nation Theory)의 형성
극단파가 대중 집회와 종교 축제를 활용하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무슬림을 힌두교도와 대립시키고 분리주의 지도자들을 부추겼다. 영국 관리들은 틸락이 창설한 고락시니 사바(Gorakshini Sabha)가 힌두-무슬림 불화의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N. M. 골드버그(N. M. Goldberg)는 틸락의 가네시 축제에 시아파와 수니파 무슬림도 참석했다고 기록했으며, 인둘랄 야그닉(Indulal Yagnik)도 이를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전투적 민족주의를 '반무슬림'으로 매도하며 탄압했고, 그 결과 '인도에는 힌두 민족과 무슬림 민족, 두 개의 민족이 존재한다'는 이민족주의 이론이 대두되었다. 이 사상에 영향을 받아 많은 무슬림이 민족 운동에서 이탈해 1906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결성했다.
민족 교육 운동과 영국의 대응
극단파는 영국식 교육이 정신적 노예를 양산한다고 보고, 독립적 사고력을 갖춘 애국 시민을 기르는 민족 교육 체제를 수립하려 했다. 그 일환으로 테오소피컬 학교·대학, D.A.V. 학교, 힌두 칼리지, 바라나시 힌두 대학(Banaras Hindu University) 등이 설립되어 민족주의 확산에 기여했다. 영국은 이에 맞서 무슬림 등 타 종교 집단이 별도의 교육 기관을 세우도록 장려했고, 그곳에서 종파적 종교 교육이 이루어지게 했다.
온건파와 극단파의 정치적 목표 차이
온건파는 영국 제국 내 '책임 정부'를 지향하며 영국의 잔류가 인도에 이익이라 보았다.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Gopal Krishna Gokhale)는 하딩 경(Lord Hardinge)이 '한 달 내 모든 영국 관료와 군대가 철수하겠다'고 하자, "그 소식을 기쁘게 듣겠지만, 당신들이 아덴에 닿기 전 우리가 전보를 보내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답해 온건파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반면 극단파는 즉각적인 스와라지를 요구했다. 틸락은 "영국이 하루빨리 인도를 떠나는 것이 인도인에게 큰 기쁨"이라 했고, 비핀 찬드라 팔(Bipin Chandra Pal)은 "스와라지는 누구도 타인에게 줄 수 없다. 영국이 오늘 스와라지를 준다 해도,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라즈파트 라이는 1905년 회의 연설에서 "영국인은 거지에게 큰 증오를 느낀다. 우리는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자립을 보일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두 세력의 상호 보완성
종합적으로 볼 때, 극단적 민족주의는 온건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동했으나 양자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온건파가 의회라는 무대를 마련하면 극단파가 이를 활용해 정책을 밀어붙였다. 역사가 람나트 수만(Ramnath Suman)은 "온건파와 극단파는 우리 민족성 발달과 정치에서 서로 보완적인 자연적 도구다. 같은 운동의 두 면이자 같은 등불의 두 결과다. 온건파가 지성(시설 획득)을, 극단파가 정서(정신 혁명)를 담당했다"고 평가했다.
탄압과 홈룰 운동, 틸락의 최후
극단파가 '정치적 자유는 민족의 생명'임을 외치자, 영국은 전면 탄압에 나섰다. 1908년 신문법(Newspaper Bill), 형법개정안(Criminal Law Amendment Act), 1911년 반역죄법(Sedition Act) 등으로 언론·표현의 자유를 옥죄고 틸락·라즈파트 라이 등 지도자들을 투옥했다. 출옥 후 많은 지도자의 사기가 꺾였으나, 1916년 럭나우 회의에서 틸락은 의회 통일을 회복하고 애니 비산트(Annie Besant)와 홈룰 운동(Home Rule Movement)을 전개했다. 장기 수감으로 건강이 악화된 틸락은 1919년 무렵 쇠약해졌고, 1915년 귀국한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가 1917년 참파란 운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의회 무대에서 입지를 넓혔다. 1919년 간디가 비협조 운동을 제안하자 틸락과 비산트는 "경박한 정치"라며 의회를 떠났다. 틸락은 1920년 8월 1일 서거해 인도는 최대 지도자 중 한 명을 잃었다.
두 척의 전함: 의회와 무슬림 연맹
1885년 영국이 인도 불만 해소용으로 만든 '의회'라는 전함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1905년 독립을 향한 전함으로 돌려세웠다. 그러자 영국은 1906년 '무슬림 연맹'이라는 또 다른 전함을 진수시켜 정반대 방향에서 의회 전함의 항로를 가로막았다. 이는 인도 독립 운동사의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