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갈리아 부족들의 정복 과정, 관용(clementia) 정책, 그리고 젊은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끈 대규모 갈리아 봉기에 대해 알아봅니다. 아울러 날개 달린 라틴어 표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jacta est)"의 유래와, 삼두정 붕괴 이후 전개된 사건들이 어떻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립으로 이어졌는지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갈리아 정복
집정관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프로콘술(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속주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두정의 영향력 덕분에 법이 요구하는 1년이 아닌 무려 5년간, 그리고 원로원의 동의 없이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할 권한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카이사르에게는 4개 군단이 배속되었고, 갈리아가 그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일리리쿰만 받았지만, 이후 아직 정복해야 할 나머지 갈리아 지역까지 위임받았습니다.
외교와 무력을 교차하며 카이사르는 갈리아 부족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습니다. 기원전 56년경에는 알프스산맥, 라인강, 피레네산맥 사이의 영토가 모두 로마에 병합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얻어졌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갈리아인들은 어떤 전쟁이든 과감하고 결연하게 시작하는 만큼, 패배와 실패를 견디는 데에는 의지가 박약하고 변덕스럽다."
카이사르는 침입한 게르만 부족들을 격퇴하며 라인강을 건넌 최초의 로마인이 되었고, 역시 최초로 브리튼섬을 두 차례 원정하여 그곳에 살던 켈트 부족 일부를 로마에 복속시키고 공물을 부과했습니다. 성공적인 장군은 문자 그대로 로마에 황금을 쏟아붓는 한편, 그 부를 발판 삼아 정치에 계속 개입했습니다.
그러나 갈리아 원정에 몰두하면서도 카이사르는 삼두정의 결속력을 놓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56년경 동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관계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카이사르는 루카(Lucca)에서 두 사람과 회동했고, 세 정치인은 기존 합의를 재확인하며 속주를 재분배했습니다.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는 폼페이우스에게, 시리아는 크라수스에게 돌아갔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통치권은 5년 더 연장되었습니다.
관용(Clementia)의 정책과 갈리아의 대반란
하지만 속주 통치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승리를 축하하는 감사 제의와 축제가 거듭 열려도, 갈리아인들은 로마의 가혹한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열망을 꺾지 못했습니다.
바로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관용(clementia)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내세울 정치의 근본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했고 불필요한 유혈을 피하려 했습니다. 죽은 갈리아인보다는 자신에게 목숨을 빚진 산 사람을 두는 편이 낫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가올 폭풍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기원전 52년, 젊은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가 이끄는 전 갈리아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카이사르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6만 명(10개 군단)에 불과했지만, 반군은 25만~30만에 달했습니다. 갈리아인들은 정면전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당하자 게릴라전으로 전환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쌓아온 정복의 성과는 이 봉기로 인해 사실상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1년, 알레시아(Alesia) 성벽 아래에서 로마군은 세 차례의 전투 끝에 간신히 반군을 격파합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포로로 잡혔고 많은 부족장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갈리아 민병대는 흩어지고 봉기는 잦아들었습니다. 기원전 52~51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다시 정복해야 했습니다.
Alea jacta e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갈리아 봉기가 진정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로마에서 곤경이 닥쳤습니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 전사하면서 삼두정은 붕괴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더 이상 카이사르와의 합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입지만 강화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공화국은 붕괴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합법적으로 이미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된 폼페이우스든, 불법적으로든 카이사르든, 누구든 공화국의 약점을 이용하기 쉬웠습니다. 카이사르가 평화적으로 문제를 종식시키고 상호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찾으려던 모든 시도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에 의해 일관되게 거부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법을 짓밟으며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카이사르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원로원의 요구에 복종하며 야심 찬 계획을 영원히 접을 것인가, 아니면 법을 어기고 폼페이우스의 독재에 맞서 싸우되 공화국의 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인가.
미래의 독재관은 기원전 49년 1월 10일, 단 하나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 본토와 자신을 가르는 작은 강 루비콘 앞에 선 채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친구여, 그것은 나에게 재앙의 시작이 될 것이며, 건너면 모든 인류에게 재앙의 시작이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마치 하늘의 계시라도 받은 듯 신속히 루비콘을 건넜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틴어: Alea jacta est)
카이사르는 로마로 진군했습니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급변하는 사태와 카이사르의 신속한 행동에 경악했습니다. 저항 준비는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이탈리아는 '법 위반자'의 손에 내팽개쳐졌으며, 무적의 폼페이우스 대왕은 원로원과 함께 황급히 국외로 도피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도시 하나씩 점령하며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로마를 향해 빠르게 진격했습니다. 갈리아에서 증원군이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 폼페이우스에 속해 있던 모든 로마 수비대가 카이사르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기원전 49년 4월 1일,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문제를 화해로 풀겠다는 카이사르의 모든 선의는, 폼페이우스와의 협상을 중재할 뜻이 없는 남은 원로원 의원들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두 번째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몇 가지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아직 남아 있던 술라와 폼페이우스의 가혹한 법령을 폐지하고, 여러 속주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평민과 기사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곡물 배급을 늘리고 빚을 일부 탕감했습니다.
파르살루스 전투와 폼페이우스의 최후
로마의 문제를 정리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급히 향했습니다. 첫 전투는 디라키움(Dyrrachium)에서 벌어졌는데, 카이사르에게 불리하게 끝났습니다. 집정관의 군대는 도주했고, 카이사르 본인도 도망치는 병사들을 말리려다 깃발 담당 군인에게 지팡이로 후려칠 뻔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절박해서 카이사르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의 수뇌부에 승리하는 법을 아는 자만 있었다면 오늘 완승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폼페이우스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고 우위를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가는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Pharsalus) 전투에서 치러야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절반에 불과한 병력으로 적군을 완파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너무 낙담하여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플루타르코스) 보였고 이집트로 도피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승리 후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정복해 나갔습니다.
카이사르의 승리는 너무나 명백해서 카시우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함대 전체가 싸움 없이 그의 두 군단에 항복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질서를 확립한 카이사르는 그제야 폼페이우스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그를 쫓아 이집트로 급행했습니다. 그러나 배신적인 이집트인들은 이미 어느 쪽에 권력이 기울었는지 간파한 뒤였고, 카이사르에게 피에 젖은 선물—적의 머리를 바쳤습니다.
백과사전에서 발췌.
함께 읽기: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1부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