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 1부

로마 역사에서 별도의 장을 차지하는 인물이 바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그의 이름은 세계사에 굳건히 새겨져 있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삼두정(트리움비라투스), 갈리아 부족 정복, 클레오파트라, 라틴어 명구 ‘알레아 약타 에스트(Alea j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와 ‘베니 비디 비키(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기었노라)’, 그리고 ‘3월의 이데스’까지 — 이 모든 이름과 개념, 사건들은 현대 교양인의 필수 지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 로마에서 어떤 사건들이 전개되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트로이 영웅 아이네아스와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사이에서 태어난 율루스(Iulus)를 조상으로 하는 오래된 파트리키(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빛나는 혈통을 지닌 만큼, 카이사르에게 로마 공화국의 요직에 오르는 일은 쉬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로마 최고 신 유피테르의 사제가 되었고, 엄격한 규율 때문에 도시를 이틀 이상 떠날 수 없었으며, 아내와 이혼할 수도, 무기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다른 길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행동으로 로마의 주목을 받으려 했습니다. 전 독재자 술라의 지지자들이 공화국을 지배하던 시기, 카이사르는 술라파의 저명한 인사들을 법정에 고발했습니다(예: 기원전 81년 집정관 돌라벨라). 물론 모든 소송에서 패배했지만, 법정에서 펼친 연설 덕분에 그는 로마 최고의 웅변가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카이사르는 정치적 올림포스로의 완만한 등반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하찮은 관직 하나를 얻는 데도 선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으니까요. 기원전 68년, 카이사르는 국고와 재정 관리를 담당하는 쿠아에스토르(재무관)에 당선되었고, 이로써 원로원 의원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기원전 65년에는 도시의 질서 유지와 건설, 축제 개최를 맡는 아이딜리스(호정관)에 선출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전례 없는 지출로 공공 오락을 열어 전임자들과 동료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의식과 연극 공연, 만찬과 연회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으며 그는 로마 평민층(플레브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축제에서 공개된, 순은으로 만든 무기와 갑옷을 갖춘 320쌍의 검투사는 로마인들을 경탄하게 만들었고, 곧 그의 환상적인 아낌없는 후함에 대한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호정관은 오락 행사를 자기 돈으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빚더미에 앉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기원전 61년에는 갚지 못할 거액 탓에 채권자들이 그의 로마 출국조차 막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집정관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승부였습니다. 기원전 63년, 카이사르는 최고 사제(폰티펙스 막시무스)직에 출마하여 두 명의 강력한 경쟁자를 꺾고, 두 사람의 득표수를 합친 것보다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됩니다.
카이사르를 향한 평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는 원로원과 귀족 대다수의 불만과 두려움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정적들은 허위 고발로 카이사르를 공화국 음모죄로 고소했지만, 카이사르는 — 드디어! — 이 소송에서 화려하게 승리합니다. 이후 같은 명분으로 최고 사제직에서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술라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분노한 평민 무리가 무기를 흔들며 원로원으로 몰려가 해당 결정의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원로원은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원전 61년, 최고 사법권을 쥔 프라이토르(법무관) 임무를 마친 카이사르는 이베리아반도의 루시타니아 지역(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현지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 거행권을 받았습니다. 이 특권은 전쟁 중 적군 5천 명 이상을 격멸하거나 왕실 포로를 생포했을 때 지휘관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군대는 그를 ‘임페라토르’로 추대했는데, 이는 병사들이 자신의 장군에게 붙여주던 명예로운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60년, 개선장군이 된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리품 분배 때 병사들에게 후한 보상을 나눠주면서도 자신의 몫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집정관 선거의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아직 이베리아에 머물던 시절, 작은 마을을 지나던 카이사르는 지인들이 이 초라한 곳에서의 권력 다툼에 대해 묻자 진지하고도 단호하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차라리 여기서 첫째가고 싶다. 로마에서 둘째가는 것보다.” 집정관직은 로마 제일인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 중 하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너무 급한 나머지 후임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베리아를 떠났습니다.
고도(古都)의 성문 앞에서 카이사르는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두 가지였습니다. 도시에 들어가 선거 후보로 서면서 개선식을 포기하거나(장군들은 로마 성문 밖에서 개선식을 기다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승리의 영광을 누리며 권력 야망을 무기한 미루거나.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법에 어긋나더라도 둘 다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강경했습니다. 결국 그는 개선식을 포기하고, 선거에서 승리해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당선됩니다.
제1차 삼두정
로마 제일인자를 꿈꾸는 카이사르처럼, 같은 시대의 두 인물도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아직 로마의 유일한 실질적 지배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카이사르의 주도로 세 정치인 간에 서로가 반대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체결됩니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의 이 동맹은 훗날 제1차 삼두정(라틴어로 ‘세 남자의 동맹’)이라 불리게 됩니다.
강력한 정치적 후원을 등에 업은 집정관 카이사르는 삼두정, 특히 폼페이우스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행보에 맞섰습니다. 로마에는 집정관이 두 명이었고, 또 다른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에 반대하며 원로원 편에 섰습니다. 상황은 무력 충돌 직전까지 번졌지만, 카이사르는 물러서지 않고 전통을 깨고 원로원을 건너뛰어 민회의 지지를 얻어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겁먹고 모욕감을 느낀 비불루스는 집에 유폐되어 임기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카이사르는 마음껏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59년 로roma에는 사실상 단 한 명의 집정관, 즉 카이사르만이 존재하는 셈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의 이름으로 해를 계산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농담처럼 기원전 59년을 ‘카이사르와 비불루스의 집정관 시대’가 아닌 ‘율리우스와 카이사르의 집정관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백과사전에서 발췌.
→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 2부
→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