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3부: '왔다, 보았다, 이겼다'에서 3월 15일의 비극까지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3부:  왔다, 보았다, 이겼다 에서 3월 15일의 비극까지

로마를 지배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통치 시리즈의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카이사르가 어떻게 종신 독재관에 올랐는지, 클레오파트라에게 매료되어 이집트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화재로 소실된 경위는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또한 그 유명한 라틴어 문구 "베니, 비디, 비치(Veni. Vidi. Vici.)"의 탄생 배경, 카이사르가 '조국의 아버지'와 '임페라토르(황제)' 칭호를 받게 된 과정, 그리고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가 어떻게 막을 내렸는지까지 함께 다룹니다.

베니. 비디. 비치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배하고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하자, 로마 거리에서는 민중들이 술라와 폼페이우스의 동상을 부수며 난동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침내 고집스럽던 원로원마저 카이사르에게 기울게 만들었습니다. 원로원은 그를 무기한 독재관으로 선포했고, 로마 시민들의 운명을 제한 없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습니다. 심지어 원로원은 훗날 누미디아와의 전쟁에서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까지 아낌없이 내주었으니, 정말 진심을 다한 예우였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환영받으며 로마로 곧장 향하는 대신 이집트에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을 조정하느라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이는 충분히 합당한 이유로 알렉산드리아 이집트인들의 반감을 샀고, 반감은 로마인에 대한 봉기로 번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화재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카이사르는 왕궁에서 헤엄쳐 탈출해야 할 만큼 위기에 처했고, 로마군은 아시아에서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포위 상태에 놓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검의 도움으로 왕좌에 올랐지만 이집트는 이제 로마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에게 깊이 빠진 카이사르는 국정과 군사 업무를 모두 제쳐두고 알렉산드리아에 무려 9개월간 머물렀습니다.

현실로의 귀환과 세 마디의 승전보

그러나 로마 본토와 속주의 상황은 그를 냉혹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폼페이우스파가 아프리카, 일리리쿰, 히스파니아에서 세력을 결집할 위험이 있었고, 파르티아 왕 미트리다테스의 아들 파르나케스는 폰투스를 정복하며 소아시아를 로마로부터 빼앗겠다고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역시 평온하지 않아 카이사르의 참전 용사들마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직접 파르나케스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여 기원전 47년 8월 2일 그를 격파했습니다. 너무나 쉽게 거둔 승리를 로마에 알리기 위해 그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바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edi. Vici.")입니다. 한편 히스파니아와 일리리쿰에서는 그의 부관들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7년 9월, 카이사르는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 모든 소요가 가라앉았습니다. 그가 병사들을 향해 '전사들'이 아니라 '시민들'이라고 부른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즉시 용서를 구하며 앞으로의 전쟁에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청했습니다.

사중 개선식 — 사중의 영광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마치 빠진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기원전 60년 개선식을 이미 거부한 바 있었습니다) 사중 개선식을 거행했습니다. 갈리아, 파르나케스, 이집트, 누미디아 전승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승전차 앞에는 그의 승리의 군단이 행진했고, 쇠사슬에 묶인 고귀한 포로들이 지나갔습니다. 갈리아를 패배시킨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 클레오파트라의 반역한 누이동생 아르시노에, 유바 왕의 어린 아들 등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노획한 군기와 전리품들이 운반되었고, 약탈한 보물의 총 가치는 6만 5천 탈란톤(탈란톤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화폐 단위)에 달했습니다. 그중에는 여러 정부와 도시들이 카이사르에게 헌상한 금관 2,822개, 무게 약 8톤에 이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화려함 한가운데 개선자 본인이 네 번이나 승전차에 올랐습니다. 키가 크고 남성적인 얼굴에, 손바닥 잎 무늬로 수놓은 흰색 튜닉을 입고 자수가 놓인 자주색 토가를 두른 모습이었습니다. 승전차에는 리크토르(집정관 호위 관리), 나팔수, 원로원 의원들이 따랐고, 네 번 모두 노예가 그의 머리 위에 최고의 영예인 승자의 금관(코로나 트리움팔리스)을 들어 올렸습니다.

전리품 배분에서 로마 시민들도 소외되지 않았습니다. 2만 2천 개의 연석에 음식이 준비되어 시민들을 기다렸고, 보병과 기병, 심지어 전투 코끼리까지 동원된 사행과 경기는 로마인들을 경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임페라토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제 카이사르의 권력 만략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고, 이름에 '임페라토르' 칭호가 더해져 이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임페라토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조국의 아버지(Parens Patriae)'와 '해방자(Liberator)'라는 명예 칭호도 받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정기적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거의 왕에 필적하는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의 씨족 이름을 딴 달, 즉 그가 태어난 달이 '율리우스', 오늘날의 7월이 되었습니다. 그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고, 그의 초상은 신들의 자리에 안치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의무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쥔 카이사르는 일련의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원로원을 확대하고 자신의 군단병들을 통해 관직 수를 늘려, 원로원과 관료제의 권력을 동시에 약화시켰습니다. 농지 개혁을 추진했고 새로운 법전('Lex Iulia de vi et de majestate')을 제정했습니다. 또한 시간 계산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적 술책의 도구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역법을 개혁했는데, 이 역법은 이후 '율리우스력'이라 불리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극장 건설, 마르스 신전 건립, 그리스·로마 도서관 개관, 다키아인과 파르티아인 정복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실현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3월의 이데스(15일)

카이사르의 관용(clementia)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에 대한 불만은 조용히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옛 폼페이우스파를 용서하고 복권시켰습니다. 파르살루스 전투 직후에도 폼페이우스의 서신을 모두 불태워 자신의 적을 지지한 사람이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자신에게 귀순하는 자라면 누구든 용서받을 것이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비는 끝내 그에게 불행으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한다거나, 곧 수도를 로마에서 소아시아로 옮긴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관직과 명예에서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로마 공화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약 60명이 참여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권력과 권위의 정점에 오른 '신성한 율리우스'는 어느새 정치적 고립 속에 서 있었습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유명한 '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에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음모자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주모자는 옛 폼페이우스파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그리고 옛 카이사르파였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습니다. 몰려든 음모자들이 우왕좌왕하며 서로를 다치게 할 정도로 벌어진 소란 속에, 전능한 독재관의 몸에는 23개의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치명상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제거된 후에도 로마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고, 음모자들이 옛 공화정을 되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습니다. 그들 자신도 곧 목숨을 잃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남긴 유산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5세기를 이어가는 로마 제국이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 후의 어떤 로마 황제도 율리우스 가문의 가이우스 카이사르처럼 밝고 놀라운 인격과 견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때로 놀라울 만큼 경솔한 무모함을 저지르면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굳건하게 권력의 정점으로 나아갔습니다. 후기 로마의 모든 통치자보다 훨씬 인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할 줄 알았고 진심 어린 자비를 베풀 줄 알았습니다. 오만한 석상이나 법전의 화신이 아니라, 바로 그런 모습으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작가이자 재능 있는 외교관, 빼어난 장군이자 로마의 전능한 독재관 —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기기 위해 너무나 적은 일이면서도 너무나 많은 일을 해낸 인물이었습니다.

백과사전 발췌.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1부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