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이 끝난 뒤 영국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 이른바 장미전쟁(1455~1485)이 벌어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장미전쟁의 종결과 그 결과로 탄생한 튜더 왕조 성립의 시작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크 가문의 쇠퇴
백년전쟁을 일으킨 에드워드 3세의 아들 대부터 갈라져 나온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골육상쟁 끝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4세는 지반을 다져 가던 중, 나이 채 많지 않은 채 급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1483).
이후 왕위는 그의 동생 리처드 3세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리처드 3세는
◆ 협력 세력과의 갈등 끝에 일부 인물을 처형했으며
◆ 즉위 과정에서 에드워드 4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 리처드 형제를 런던탑에 감금시켰습니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귀족 계급의 반감을 샀고, 그중에서도 반감이 컸던 것은 에드워드 5세 등의 어머니이자 에드워드 4세의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녀의 친정인 우드빌 가문이었습니다.
* 이 시점에서 이미 두 왕자는 살해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폴 델라로셰 「탑 속의 왕자들」 (출처: 위키백과)
헨리(7세)와 모후 마거릿의 움직임
리처드 3세 진영에 있던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포드(랭커스터 계보)가 리처드 3세 타도 음모를 꾸몄고, 헨리(7세)와 그의 어머니 마거릿 역시 이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당시 헨리(7세)는 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생존 남성으로서 요크 가문의 표적이 될 위험에 처해 있었기에, 음모가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숙부 재스퍼와 함께 대륙의 브르타뉴 공국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브르타뉴 공국은 어떤 곳이었나
브르타뉴 공국은 잉글랜드 헨리 2세 왕의 후계 분쟁 당시 넷째 아들 제프리가 물려받은 땅으로, 이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등 양측의 영향을 번갈아 받아 왔습니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하고 장미전쟁이 시작되자, 브르타뉴는 프랑스에 흡수될 위기에 놓였고, 이에 반발해 부르고뉴 공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저항했습니다.
헨리(7세)와 재스퍼는 1471년 랭커스터파가 요크파에 패배한 뒤 망명 신세가 된 인물들이었습니다. *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이 랭커스터파로 돌아선 뒤 벌어진 전투에서 요인들이 연달아 전사하며 랭커스터파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바 있습니다.
1476년에는 에드워드 4세가 헨리를 요크 가문에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브르타뉴 공국은 요크 가문과 동맹 관계가 아니었고, 프랑스와의 반란 문제가 타결·화해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후 브르타뉴는 랭커스터파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헨리(7세)는 브르타뉴 공국의 지원을 받아 음모에 따라 잉글랜드 상륙을 시도했으나 폭풍으로 실패했고, 음모를 주도한 버킹엄 공작은 처형당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리처드 3세는 브르타뉴 공국 대신 그 재정 담당자에게 압력을 가해 헨리(7세)를 축출하려 했고, 이를 눈치챈 헨리(7세)는 프랑스로 도피합니다.
한편 어머니 마거릿은 네 번째 남편인 요크파 토머스 스탠리의 영향력을 활용해, 친척마저 처형당했음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손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하여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7세)의 약혼과 동맹이 성립되었고, 이렇게 헨리(7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일 뿐만 아니라 '요크 가문의 딸을 아내로 둔 자'가 되어 왕위 계승에 한층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보즈워스 전투(1485)
브르타뉴에서의 압력을 피해 도피한 곳은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요크 가문과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와의 대립도 있었기에 잉글랜드 침공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고, 랭커스터파에 가까웠던 스코틀랜드 역시 협력했습니다.
1485년, 헨리(7세)는 숙부 재스퍼 등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웨일스에 상륙했습니다. 아버지가 웨일스 왕의 혈통을 이었기에 병사들은 급속히 불어났고, 리처드 3세에 반기를 든 우호 세력까지 합류하면서 [보즈워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전사했습니다. 비록 다른 왕위 계승 후보들이 남아 있어 지반이 완전히 다져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리처드 3세의 죽음과 함께 장미전쟁은 막을 내렸고, 헨리(7세)는 헨리 7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헨리 7세의 통치
헨리 7세는 백년전쟁부터 장미전쟁까지 지칠 대로 지친 잉글랜드를 재건하기 위해 왕권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내정 면에서는 우선 왕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아내의 지위 확보에 나섰습니다. 그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출신이었지만, 요크 가문의 정통 딸과의 결혼을 통해 두 가문을 완전히 융합시켰습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리처드 3세는 즉위 과정에서 의회를 통해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무효이므로,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열 명의 자녀는 모두 서자”라는 선언을 통과시킨 바 있었습니다. 아내가 서자 신분으로 남아 있는 한 다른 귀족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외교·무역 정책
- 프랑스와 영토 분쟁을 피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잉글랜드 왕을 자칭하는 세력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습니다
-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의 중요성을 인식해 장남 아서와 스페인 공주의 약혼을 추진했습니다 (← 막대한 지참금을 요구했습니다. 병약하던 아서가 15세로 요절하자, 훗날 차남 헨리 8세가 그녀와 약혼하게 됩니다)
- 무역 진흥
- 네덜란드와 자유 무역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 잉글랜드에서 무역 특권을 누려 온 베네치아와 한자동맹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자주권을 되찾았습니다
-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해 세계 최초의 드라이독(선박 건조·수리를 위해 물을 빼낼 수 있는 시설)을 건설했습니다
이처럼 헨리 7세는 평화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다양한 내외 정책을 실시하며 번영을 추구했습니다. 그가 다져 놓은 기반은 차남 헨리 8세에게 고스란히 물려지며, 튜더 왕조 전성기의 발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