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한일병합과 만주 진출: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확장 과정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전,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명분으로 내걸며 한일의정서를 조선 정부와 체결했습니다. 이어서 조선의 외교권을 제한하고 재정에 대한 일본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내용의 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습니다.


이는 러시아에 맞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으며, 동시에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본격적인 팽창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 강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앞서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제한하고 보호국화를 추진했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통치하려면 서구 열강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1905년 미국과 비공식적으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고,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을 개정하며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권을 승인받았습니다.


열강의 승인을 확인한 일본은 곧바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한성에는 조선의 외교를 감독하는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면서 보호국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이러한 침탈에 맞선 반일 운동이 대한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고종 황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열강에 호소했으나, 각국이 이미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 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내정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켰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침탈에 맞서 독립을 되찾으려는 의병 운동이 더욱 격화되자, 일본 정부는 1909년 의병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한일병합은 급속히 추진되었고,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국호는 '조선'으로 바뀌었고, 통치 기관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초대 총독에는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임명되어, 군과 경찰력을 배경으로 한 무단통치(헌병경찰제도)가 조선에 시행되었습니다.

만주 본격 진출

한편 일본은 만주로의 확장을 본격화해 나갔습니다.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남만주에서 여러 권익을 획득한 일본은, 1906년 관동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관동도두부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해 철도 연선의 탄광까지 경영함으로써 만주 경제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이에 만주 시장에 관심을 두던 미국은 문호개방을 호소하며 일본의 남만주 권익 독점에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미일 관계는 냉각되었고, 미국 서부에서는 일본인 이민 배제 운동이 거세졌습니다.


또한 청나라 영토 내 권익 반환 요구가 높아졌지만, 일본은 1905년의 제2차 영일동맹과 한러협약을 방패 삼아 만주에서의 권익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1911년 전제 정치와 열강의 지배에 맞선 신해혁명이 일어나, 쑨원(손문)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었고 약 300년 왕조를 이어온 청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영일동맹은 유지되었고 한러 관계도 개선되었습니다. 이후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국제 정세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