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프랑스의 몰락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의 전운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뒤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노선을 따라 양측 군대가 마주 본 채 큰 교전 없이 시간만 흘러간 이른바 '가짜 전쟁(phoney war)' 시기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아르덴느 숲을 관통하는 대규모 기습 공세를 개시합니다. 단 며칠 만에 프랑스군은 붕괴했고,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준장이었던 샤를 드 골은 6월 16일 런던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바로 그날 각료평의회 의장 폴 레노(Paul Reynaud)가 사임하고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원수가 새 정부 수립을 위임받게 됩니다.
1940년 6월 18일

주요 인물
-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연설의 경위
드골은 6월 17일 런던에 도착해 처칠을 알현했고, 처칠은 그에게 BBC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목소리를 전할 기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6월 18일의 항소는 프랑스 방송을 통해 독일과의 전쟁을 끝내겠다고 국민에게 알린 페탱의 담화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오후 8시경, 드골은 페탱과는 정반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을 아직 참전하지 않은 미국을 포함한 더 넓은 세계대전의 맥락 속에 놓았습니다. 짧지만 힘 있는 연설문은 "프랑스는 혼자가 아니며", 자국의 식민 제국과 영국, 그리고 미국의 산업력에 힘입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이 연설을 직접 들은 프랑스인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연설문의 일부가 이후 신문에 게재되면서 점차 프랑스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결과와 영향
- 페탱 정부는 이 항소에 강하게 반발했고, 1940년 8월 2일 군사법정은 드골에게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 이 연설의 기념적 의미가 컸던 만큼, 프랑스 공산당은 '7월 10일의 항소(Appel du 10 Juillet)', 일명 '프랑스의 인민들이여'라는 전단을 발간하며 애국주의에 계급투쟁 논리를 접목한 자신들만의 저항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 프랑스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서 6월 18일 항소는 훗날 제작된 청·백·적 삼색 테두리의 포스터와 자주 혼동됩니다. 그 포스터에는 "모든 프랑스인에게. 프랑스는 한 번의 전투를 잃었을 뿐, 전쟁을 잃지 않았다"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 드골은 저항 운동의 통합을 이끌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자유 프랑스(Free France)의 정당한 대표로 인정받았음에도, 자신이 단지 '6월 18일 항소의 남자'로 축소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