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작은 유인도인 니이하우(Ni'ihau) 섬. 19세기부터 개인 소유지로 남아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이 '금단의 섬'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영화 쥬라기 공원의 일부 장면이 촬영된 장소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에 참여했던 일본군 전투기 한 대가 이곳에 불시착하며 벌어진 비극, 이른바 '니이하우 사건(Ni'ihau Incident)'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상인의 딸이 일군 '금단의 섬'
니이하우 섬의 역사는 1864년, 스코틀랜드 출신 부호의 딸 엘리자베스 맥허치슨 싱클레어(Elizabeth McHutcheson Sinclair)가 하와이 왕정으로부터 1만 달러를 주고 섬을 사들이면서 시작된다. 남편 프랜시스 W. 싱클레어 선장을 1846년 폭풍우로 잃고 여섯 자녀를 홀로 키워야 했던 그녀는 뉴질랜드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를 거쳐 하와이에 정착, 양목장으로 섬을 경영하다 1892년 생을 마감했다.
이후 섬은 증손자인 아일머 프랜시스 로빈슨(Aylmer Francis Robinson)에게 상속됐다. 그는 이웃 섬인 카우아이(Kaua'i)에 거주하며 매주 배를 타고 니이하우를 순시했다. 1941년 12월 7일, 그날이 섬의 운명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진주만 공습, 그리고 불시착
그날 아침, 일본 제국 해군(닛폰 카이군) 소속의 22세 청년 조종사 시게노리 니시카이치(Shigenori Nishikaichi)는 항공모함 히류(Hiryū)에서 발진한 A6M 제로(Zero) 전투기를 몰고 제2파 공격대에 합류했다. 모카푸 해군 항공기지와 벨로우스 육군 비행장 폭격 및 기총 소사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미군 커티스 P-36A 전투기 9대와 공중전을 벌였다.
구형이던 미군기들은 격추됐지만, 니시카이치의 제로 기체도 피탄되어 연료 탱크가 손상됐다. 연료가 새어 나가는 기체로 200마일 떨어진 항공모함까지 귀환하는 건 불가능했다. 비상 착륙 계획 '플랜 B'에 따라 지정된 무인도로 향했지만, 일본 해군 수뇌부의 정보 실수로 그곳은 무인도가 아니었다. '카푸 섬(Kapu Island, 금지된 섬)'으로 불리던 니이하우에는 약 136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동료 사부로 이시이(Saburo Ishii)는 바다에 추락해 사망했고, 니시카이치는 농장주 하윌라 칼레오하노(Hawila Kaleohano)의 밭에 철조망과 엉키며 불시착했다. 기체에 그려진 '욱일기'를 본 칼레오하노는 조종사가 아직 정신없는 틈을 타 조종석에서 서류와 남부 14권총을 압수했다.
환대에서 적대로, 엇갈린 운명
섬 주민들은 다친 조종사를 마을로 데려가 극진히 대접했고, 심지어 환영 잔치까지 베풀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일본계 양봉업자 이시마츠 신타니(Ishimatsu Shintani)를 통역으로 불렀다. 40년 넘게 섬에 살며 원주민 여성과 결혼했던 그였지만, 니시카이치와 대화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주민들은 다시 섬에서 태어난 2세 일본계 미국인(니세이) 요시오 하라다(Yoshio Harada)에게 통역을 맡겼다. 니시카이치의 사정을 들은 하라다는 동포애와 의무감으로 그를 돕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진주만 공격 소식이 전해지고, 다음 날 로빈슨 소유주가 오면 넘기기로 했던 주민들의 태도가 돌변하자 상황은 급변한다.
일주일간의 대치와 탈출극
전시 해상 교통 통제로 로빈슨이 오지 못하는 사이, 니시카이치는 하라다의 집에 감금됐다. 섬 주민들은 횃불과 탐조등으로 카우아이 섬에 구조 신호를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12월 13일, 신타니가 칼레오하노에게 조종사 서류를 돌려주는 대가로 200달러를 제시했으나 거절당하자 협박했다. 이를 계기로 하라다 부부와 니시카이치는 탈출을 결행한다.
아내 아이린이 축음기 소리로 소음을 덮는 사이, 하라다와 니시카이치는 감시병을 제압하고 로빈슨의 창고에 보관돼 있던 산탄총과 권총을 챙겼다. 이들의 목표는 니시카이치가 기체에 둔, 암호와 공격 계획(실행되지 않은 제3파 공습 계획 포함)이 적힌 기밀 서류 회수였다.
최후의 결투, 그리고 영웅
칼레오하노가 마침 외부에 있어 서류를 찾지 못하자, 이들은 불탄 전투기 잔해로 향했다. 그 사이 칼레오하노는 달아나 이웃들에게 경고했고, 주민들은 동굴과 해변으로 피신했다. 니시카이치는 전투기 잔해에서 7.7mm 기관총을 떼어내 무장하고 기체와 칼레오하노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칼레오하노가 서류를 챙겨 도망친 뒤였다. 니시카이치는 인질극을 벌이며 주민 카히마(Kalima)와 베네하카카 카나헬레(Benehakaka Kanahele, 별명 벤)를 협박해 칼레오하노를 데려오라 명령했다. 벤은 아내를 인질로 맡기고 가는 척하다가, 아내가 이미 카누를 타고 카우아이로 피신했음을 알고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돌아온 니시카이치가 속임수를 알고 격분해 총을 쏘자, 벤은 세 발의 총상을 입고도 괴력을 발휘해 니시카이치를 벽으로 내던졌다. 아내가 돌로 머리를 가격하고, 벤이 칼로 목을 그어 니시카이치를 처치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하라다는 자책감에 산탄총으로 자살했다.
사건의 여파: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의 빌미가 되다
12월 14일, 칼레오하노가 10시간 노를 저어 카우아이로 건너가 신고한 끝에 로빈슨과 미군이 니이하우에 상륙했다. 신타니와 아이린 하라다는 체포됐고, 아이린은 간첩 혐의로 오아후 섬 군사 교도소에 수감됐다 1944년 6월까지 재판 없이 갇혀 있었다.
미 해군은 이 사건을 보고서로 작성하며 "일본계 시민 약 12만 명이 비슷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명령 9066호와 9102호 발동으로 이어져, 서부 해안 거주 일본계 미국인 전체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는 비극의 단초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와이 본토의 일본계 주민들은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해 경제 마비 우려로 수용을 면했다.
기억되는 이름들
벤 카나헬레는 부상에서 회복해 1945년 퍼플 하트 훈장과 공로 훈장을 받았으나, 그와 함께 싸운 아내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오아후 섬 진주만 항공 박물관에는 니시카이치의 제로 전투기 잔해가 전시되어 있다. 니시카이치의 유해는 화장되어 고향 이마바리(Imabari)로 보내졌고, 1956년 그의 위패가 모셔진 추모비에 안치됐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범한 섬사람들과 한 젊은 조종사의 운명이 잔혹하게 교차했던, 6일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