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소모전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 동맹과 프랑스·영국·러시아를 축으로 하고 이후 이탈리아와 미국이 합류한 삼국 협상(협상국) 간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양측 모두 참호전에 발이 묶였고, 특히 독일은 국력이 크게 소진되었습니다. 심각한 경제 위기에 시달린 빌헬름 2세의 제국은 극심한 물자 부족에도 허덕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독일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끝까지 자국이 승리하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휴전 관련 주요 인물
- 빌헬름 2세 (독일 황제)
- 바덴 공자 막시밀리안
- 필리프 샤이데만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에리히 루덴도르프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구스타프 바우어
-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 발터 폰 뤼트비츠
- 구스타프 노스케
- 볼프강 카프
- 로자 룩셈부르크
- 카를 리프크네히트
- 아돌프 히틀러
휴전까지의 경위 — 1918년 11월 11일

1918년 7월, 독일군은 마지막 대공세인 제2차 마른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빌레르코트레 반격과 이어진 1918년 8월 8일의 전투는 전쟁의 귀추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11월 9일, 군중의 압박과 신임 수상인 바덴 공자 막시밀리안의 권고 속에 황제 빌헬름 2세는 퇴위합니다. 혁명을 우려한 사회민주당(SPD) 지도자 필리프 샤이데만은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탁) 발코니에서 공화국의 선포를 선언했고, 곧이어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뒤따라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젊은 바이마르 공화국은 문관 정치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를 대표로 하여 1918년 11월 11일, 레톤드 인근 콩피에뉴 숲 한복판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배후 중상설'과 비운의 공화국
패전을 납득하지 못한 국민들은 분노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같은 독일의 고위 인사들은 독일군의 패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 중상설'을 퍼뜨렸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바로 이런 비인기 속에서 태어났으며, 유혈 사태가 벌어진 '1월의 피의 주간' 직후인 1919년 1월 19일 제헌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대통령에 취임했고, 샤이데만이 초대 내각을 이끌었습니다.
독일 국민들에게 이 새 정권은 '굴욕의 조약'의 주체였습니다. 신임 수상 구스타프 바우어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서명한 강화 조약은 국민들의 원망을 산 것입니다. 한편 러시아에서 불어온 혁명의 물결은 독일에도 닥쳤습니다. 독일 최초의 공산당인 KPD는 시위와 노동자 평의회를 잇달아 조직했고, 자유군단(Freikorps)과 군부(특히 발터 폰 뤼트비츠와 구스타프 노스케)는 폭동 진압 과정에서 폭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치적 불안정(피의 성탄절,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카프 폭동, 루르 지방 봉기, 뮌헨 맥주홀 폭동 등)과 경제적 궁핍(초인플레이션), 그리고 끝내 극복하지 못한 깊은 비인기라는 짐을 안고 신음하게 됩니다.
역사적 결과와 영향
- 패전 속에서 탄생한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탄생과 동시에 좌파 노동자 봉기와 급성장하는 민족주의 사이에서 찢겨 나갔고, 그 일관성 없는 통치는 좌우 양극화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 지워진 정권: 공화국은 스스로 극단의 길을 열어주었고, 강력한 독재 권력의 부상을 초래했습니다. 결국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제3제국의 암울한 시대가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