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으로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루제 드 릴, 이지도르 필(Isidore Pils)作, 1849년. 스트라스부르 역사박물관 소장 • WIKIMEDIA COMMONS
1849년, 즉 사건으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뒤 화가 이지도르 필은 ‘라 마르세예즈’의 전설을 그림으로 정착시켰습니다. 그 전설에 따르면 천재적인 젊은 대위 클로드 루제 드 릴(Claude Rouget de Lisle)이 스트라스부르 시장의 살롱에서 이 찬가를 처음 불렀다고 합니다. 1792년 4월 25일 밤부터 26일로 넘어가는 그날 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어느 저녁 리셉션 자리에서 시장이자 부유한 산업가였던 프레데릭 드 디트리히(Frédéric de Dietrich)는 당시 국경으로 떠나던 의용병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없음을 아쉬워했고, 이것이 여가 시간에 작곡을 하던 젊은 장교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흔히 그렇듯 실상은 좀 더 미묘합니다. 이 일화가 신화에 불과하다 해도, 그것은 어쨌든 이 군가가 남긴 특별한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라 마르세예즈는 그 힘과 보편성 덕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국가 중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급진성과 폭력성으로 가장 크게 논란이 된 찬가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가 지닌 에너지와 그것이 촉발한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792년 봄의 긴장된 상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4월 20일 프랑스는 보헤미아·헝가리 왕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는 혁명을 전복하고 왕정을 복원하려는 개입 가능성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연맹’이라 불린 무장 집단들의 자발적 결집을 통해 수만 명의 젊은 의용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국경으로 행진하며 도처에서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 거주하던 루제 드 릴은 공화주의자가 아니었지만, 프랑스 내외에서 반혁명 세력이 조직되며 1789년 이후 헌신해 온 이들을 위협하자 많은 프랑스인들처럼 온건 왕정주의자였던 그 역시 점차 급진화되어 갑니다.
‘이미 들어본’ 듯한 선율
선전포고 이후 며칠, 몇 달 동안 분위기는 군사화되었고, 무기를 들어 같은 시민 공동체 안에 사는 이들을 지키려는 ‘시민-병사’의 이상이 강조되었습니다. 라드레(Ladré)의 유명한 카 이라(ça ira, 잘 될 거야!)를 비롯해 행진, 축제, 집회를 수놓던 수많은 노래들은 새로운 국면 앞에서 너무 가볍고 연약하게 느껴졌습니다. 일상 곳곳에 스며 있던 노래는 또한 항의 문화의 일부였습니다. 노래는 민중을 동원하고, 정치 담론을 짜 올리고, 용기가 필요한 순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루제 드 릴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향력 있는 ‘헌법 친우회’ 회원이었는데, 이 모임의 노래 하나는 1770년대 미국 독립혁명 때부터 들려온 구호를 차용해 평범한 시민들에게 목숨을 걸고 혁명에 헌신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전쟁의 깃발이 펼쳐졌다. […] 싸워야 한다. 이기거나 죽거나.” 루제가 작곡한 라인 방면군을 위한 전쟁의 노래는 엘리트 사회(모차르트의 일부 구절이 인식됩니다)는 물론 노동 계급 사이에서 여러 해 동안 유통되던 가사와 선율을 한데 응축했습니다. 이런 ‘이미 들어본’ 듯한 익숙함과 통합적 감동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이 노래가 숲의 불길처럼 빠르게 번져간 이유였습니다. 특히 몽펠리에와 마르세유 출신 의용병 대대들이 1792년 여름 새 연맹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로 향하면서 그러했습니다. 이 찬가를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들 덕분에 이 노래는 곧 ‘마르세유인들의 찬가’, 다시 ‘라 마르세예즈’로 불리게 됩니다. 이는 혁명이 오랫동안 자코뱅파적, 즉 후대에 그 단어가 갖게 된 의미대로 중앙집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방제적으로 살아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혁명의 테 데움’
1792년 8월 10일 군주제 붕괴 직후 탄생한 카르마뇰라와의 경쟁 속에서, 라 마르세예즈는 초기에는 공화주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튈르리 궁 습격 당시 연주되면서 일종의 마법 같은 노래로 변모합니다. 수많은 온건 왕정주의자들이 부르던 이 노래는 그럼에도 공화국의 탄생과 함께했습니다. 1792년 9월 고세크(Gossec)가 오페라 자유에 바치는 헌상에서 편곡한 라 마르세예즈는 전장에서, 프랑스군이 ‘해방된’ 도시와 지역에 입성할 때, 그리고 축일(1794년 6월 8일 최고 존재의 축제 등)과 군사적 승리의 공식 기념행사에서 불렸습니다. 또한 집단적 동원 과정에서, 심지어 일부 공개 처형 현장에서도 자발적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물론 1792년 가을부터 새 공화국 정권이 젊은 체제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 노래를 활용하면서, 노래는 점차 자발적 성격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민중은 주입되는 시민성의 표식 앞에서 수동적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라 마르세예즈는 전쟁 중인 지역, 특히 알자스에서는 널리 퍼졌지만, 프랑스 북부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정착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1793년 산악파 공화국에 맞서 봉기한 민중들 사이에서는 더 온건한 찬가(‘노르망디인의 마르세예즈’)나 노골적으로 반혁명적인 노래가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그레트리(Grétry)가 1784년 작곡한 오페라 코미크에서 따온 ‘오 리샤르, 오 나의 왕이여’는 선율은 1789년부터 절대왕정 지지자들의 구호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해외에서 라 마르세예즈는 매우 빨리 프랑스 혁명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792년 9월 발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으로 참전한 괴테는 이 노래를 ‘혁명의 테 데움’이라 묘사했습니다.
시대를 비추는 가사
라 마르세예즈가 여전히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는, 공화국이 얼마나 급진주의와 시민 공동체의 생존에 대한 결의 속에서 탄생했는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후렴의 유명한 구절(“탁한 피가 우리 밭고랑을 적시게 하라”)은 오랫동안 유럽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퇴폐의 책임자로 규정되어 온 폭군과 귀족의 죽음을 명백히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 폭력성은 프랑스인들이 지배당하고 복종을 강요당했다고 여긴 평범한 외국 병사들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슬픈 희생자들을 용서하라 / 그들은 후회하며 당신들과 맞서 싸운다”). 사후에 추가된 일곱 번째 연, 이른바 ‘아이들의 연’은 시민성이 무장한 방위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선배들이 없어질 때 / 우리가 그 길에 설 것이다.” 이 급진성이야말로 노래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기도 합니다.
1793년 11월 24일, 국민공회는 모든 공연장에서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도록 포고합니다. 몇 달 동안 많은 ‘애국적’ 극장들이 이미 자발적으로 이 노래를 공연에 넣고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실각시키고 1793년 봄에 세워진 예외적 공화국이 그와 함께 소멸한 것처럼 믿게 만드는 데 성공한 온건 공화파는 어떤 형태의 급진주의도 배격하며 메율(Méhul)과 셰니에(Chénier)의 더 온건한 출발의 노래를 선호합니다. 왕당파는 자코뱅파를 ‘피 마시는 자들’로 규정하며 복수를 호소하는 인민의 각성을 밀었습니다. 그러나 라 마르세예즈의 성공은 이미 너무나 강력해서, 군중을 열광케 하는 것은 역시 이 노래였습니다. 1795년 7월 14일, 라 마르세예즈는 공식적으로 국가(國歌)가 됩니다. 이후 한 세기의 격변이 그 존재를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제1제정기에는 금지되었고, 1879년에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상징적이면서도 여전히 뜨겁게 논쟁 중인 국가로 자리매김합니다.
더 알아보기
라 마르세예즈(The Marseillaise), F. 로베르, 국립인쇄국, 1989.
“대열을 이루어라!”
1830년 혁명 이후 파리 에투알 개선문에는 프랑수아 뤼드(François Rude)의 작품 1792년 의용병의 출발, 흔히 라 마르세예즈라 불리는 부조가 장식되었습니다. 작품 최상단에는 전쟁의 천재를 상징하는 젊은 여성이 날개를 펼치고 경보를 울리며, 검으로 의용병들을 전장으로 이끕니다. 그 아래로는 투사들이 그리스·로마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사슬 갑옷과 흉갑을 두른 지도자는 투구를 휘두르며 병사들을 고취하고, 그 뒤에는 분노에 주먹을 쥔 벌거벗은 청년이 따릅니다. 오른쪽에는 검을 뽑으려는 중년 남성이 서 있고, 왼쪽에는 활을 당기는 맨가슴의 청년과 날개 달린 여인을 향해 나팔을 부는 병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거의 단두대까지 갔던 사람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은 온건한 정치관을 지닌 인물로, 1792년 군주제 전복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대위로 복무하는 동안 두 차례나 투옥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