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기독교 연합에 의한 종교재판(인퀴지션)의 설립과 역사

종교재판(Inquisition)은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조사' 또는 '심문'을 뜻하는 이 제도는 가톨릭 교리에서 벗어난 이들을 색출해 세속 권력에 넘겨 처벌하게 하기 위해 설립된 일종의 법정이었습니다.

초기 종교재판의 배경

가톨릭 권위는 4세기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이후,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고 이단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후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가톨릭이 '국교'로 받아들여지면서, 가톨릭에 반항하는 행위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간주되었습니다. 각국 정부는 가톨릭에 반대하는 설교자들에게 추방, 재산 몰수, 투옥, 화형 등의 형벌을 내렸습니다.

교회의 배타성 강화와 십자군 운동

이 시기 교황의 시야는 크게 좁아져, 가톨릭 신앙을 따르면서도 지역 전통을 지키거나 독자적 견해를 표명한 그리스도교 집단까지 '비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고 십자군을 선포해 이들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 의도는 가톨릭의 모습이 로마 교회의 가르침대로 어디서나 똑같아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르놀도 다 브레시아의 순교

1155년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인기 설교자 아르놀도(Arnold)는 성직자들의 부패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했습니다. 기독교 연합은 그를 체포해 교수형에 처한 뒤 시신을 태우고 재를 티베르 강에 뿌렸습니다. 아르놀도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평온을 지켰습니다.

프란치스코회와의 갈등

1181년 아시시의 부유한 청년 프란치스코(Francis)는 재산을 버리고 가난과 봉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당시 가장 비참했던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늘어나 '성 프란치스코회(Saint Francis Union)'가 결성되었는데, 이는 인도의 불교 승가처럼 고통받는 이들을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십자군 전쟁 중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까지 가서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도였음에도 무슬림들은 그를 깊이 존경하며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1226년 선종한 후, 기독교 연합 지도부와 프란치스코회 지도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지나친 청빈 생활을 강조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교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알비파(카타르파)의 부상과 종교재판소의 정식 설립

12세기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그리스도교 종파가 퍼지면서 사회적·정치적 불안이 커졌습니다. 특히 프랑스 남부에서 '알비파(Albigensians)'가 세력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물질세계는 악한 존재의 창조물이며 인간의 몸도 오염되어 있다'고 믿고, 자살은 옳지만 결혼은 육체의 삶을 연장하는 수단이므로 나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종파의 '완전자(Perfecti)'는 금욕을 지켰으나, 일반 신도에게는 '완전한 금욕이 어렵다면 결혼보다 간음이 낫다'고 가르쳤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에 격렬히 반발했고, 프랑스 정부는 알비파 추종자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교회가 맡아, 1233년 정식으로 종교재판소(Inquisition)가 설립되었고 이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로 퍼졌습니다. 로마 교회가 임명하는 재판관들이 전국을 순회하며 피의자들에게 이단 사상을 철회하고 참회할 것을 권유했고, 거부하는 자들은 세속 권력에 넘겨 처벌받게 했습니다.

용의자가 생기거나 고발이 들어오면 심문을 통해 신앙을 검증했고,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처벌받았습니다. 고발자의 이름은 비밀로 유지되었으며, '참회한 죄인'까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가들은 종교재판을 강하게 규탄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의 화형

1318년 프란치스코회와 로마 기독교 연합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옳지 않게 여겼으나, 교회는 지나친 청빈 강조가 그리스도교 정신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분쟁 끝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4명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마르세유에서 화형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로마 교회는 프란치스코회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습니다.

네루의 증언: 종교재판의 잔혹성

자와할랄 네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체포되어 심문받고 수백 명이 산 채로 화형당했다. 화형보다 더 끔찍한 것은 참회를 강요하기 위한 고문이었다. 많은 가련한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는데, 이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주로 폭도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것이 종교재판의 명령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교황은 '신앙 칙령(Edict of Faith)'을 발표해 모든 사람에게 밀고자가 될 것을 명령했다. 교황은 연금술을 악마의 기술이라며 파트와(교령)를 내렸다. 이 모든 잔학 행위와 테러가 진정한 신앙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그들은 사람을 산 채로 태움으로써 그 영혼이나 타인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한다고 믿었다. 종교인들은 종종 자신의 견해를 타인에게 강요하려 했다. 억지로 생각을 목구멍에 쑤셔 넣으면서 그것이 대중을 위한 봉사라고 여겼다.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을 저질렀다. 불멸의 영혼을 구한다며 육신을 재로 만드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종교의 성적표는 매우 초라하지만, 내 생각엔 오만과 잔혹함에서 종교재판을 능가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스페인 종교재판

스페인 일부 지역은 7세기 동안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무슬림 통치가 끝나자 대다수는 떠나거나 개종했으나, 일부는 비밀리에 이슬람교를 믿으며 남았습니다. 일부 유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이들에게 '기독교인이 되거나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13세기 스페인에서 도미니코(Dominic)라는 성인이 기독교 연합 내에 '도미니코회(Dominic Union)'를 세웠습니다. 이 수도회는 광신적이고 엄격해 스페인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종교적 명령을 내리고 따르지 않는 자들을 폭력으로 복종시켰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1478년 스페인 국왕은 비밀리에 사는 무슬림과 유대인을 색출하기 위해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설립했습니다. 스페인 정부는 개종한 '새 그리스도교도'들이 내심으로는 여전히 무슬림이나 유대교도인지 의심했습니다. 이들은 반복적으로 시험받았고,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화형당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19세기 전반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로마 종교재판과 성성청(성직자성)

중세 종교재판은 13~14세기에 활발히 활동하다 1542년 재정비되어 '로마 종교재판(Roman Inquisition)'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성성청(Holy Office, 성직자성)'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 기구는 오늘날에도 같은 이름으로 존속하며,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고 종교 원칙을 올바르게 정립·해석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중세 및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가톨릭 교회는 득보다 실이 컸습니다. 종교재판의 잔혹성이 과장되어 전해지거나 처형자 수가 부풀려진 면도 있으나, 이 제도가 인간의 기본권을 무시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법에도 '누구도 본인 의사에 반해 가톨릭 신자가 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편 교회 체제와 중세 유럽

일부 역사가들은 성인들이 이 종교를 지키기 위해 겪은 수난과 유사한 박해가 기독교화 과정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봅니다.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과 엄격한 통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가르침을 가렸습니다. 로마 교회와 황제 권력이 결합하면서 '제국은 교회의 세속적·무력적 통치 기구이며, 교황이 세우고 교황에게만 책임진다'는 새로운 교리가 등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 식민주의와 기독교는 밀접히 연결되었습니다. 1세기 기원 초기 기독교는 진보적 종교로 로마 제국에 도전했으며, 검소하고 허례허식이 없었습니다.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단순함을 구원의 길로 강조했으나, 8세기 이후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학자들이 '구원은 신앙이 아닌 선행(착한 행실)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옛 성인들의 가르침을 뒤집었습니다.

이들은 '선행'을 성직자와 의식(儀式)으로 해석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니 모든 그리스도교도는 그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시기 의식주의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배하며 중세 교회 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부가 로마에 있고 유럽 전역에 지부를 둔 이 체제는 '보편 교회 체제(Universal Church System)'라 불렸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유럽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교육과 예술도 교회의 통제 하에 들어갔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학자들의 저작은 기독교 확산과 함께 대부분 소실되어, 이후 변화를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 르네상스 시기에 보편 교회 체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왕정, 때로는 귀족과 결탁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과 유럽 암흑기의 원인 중 하나로 화려한 의식만 남은 교회 체제가 지목됩니다.

서로마 제국 멸망의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로마 내 기독교의 확산이었습니다. 교황이 유럽 정치에 개입하면서 황제의 권위가 약해졌고, 이로 인해 황제와 교황 사이에 빈번한 갈등이 빚어져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