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로마 군단과 베르킨게토릭스의 마지막 대결

로마의 세력은 지중해 연안 전역으로 뻗어 있었다. 이 거대한 로마 영토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는 야심찬 인물들 가운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다. 그는 승전 장군 폼페이우스와 대립하던 중 군사적 영광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카이사르를 경계하던 원로원은 기원전 58년, 그에게 갈리아 정복을 명령한다.

기원전 58년 ~ 기원전 51년

주요 인물

율리우스 카이사르
베르킨게토릭스

정복 과정

기원전 58년, 갈리아 중부에 거주하면서도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아에두이족이 헬베티족(갈리아 동부에 자리 잡은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헬베티족은 손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카이사르는 비브락테(오늘날 부르주와 디종 사이)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같은 해 그는 부르고뉴를 침공한 게르만족의 아리오비스투스마저 물리쳤다.

이어 기원전 57년에는 수아송, 보베, 아미앵, 에노 지역의 벨기계 부족들과 에부론족, 네르비족, 벨로바키족을 연파했고, 아르모리카인들도 항복했다. 알프스 너머 로마에서는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1년 뒤에는 베네티족과 아키텐이 로마 장군 앞에 무릎 꿇었고, 이어 게르만족마저 축출되었다.

카이사르는 이어서 브리튼 섬으로 눈을 돌린다. 한편 그는 에부론족(벨기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그들의 지도자가 한 개 군단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기원전 54~53년). 진압은 극도로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로마군에 의한 오를레앙 학살 이후,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인들에게 봉기를 호소한다. 북방으로 철수해 있던 카이사르(기원전 53년)는 반란을 주도하는 갈리아 통합 지도자의 움직임에 놀라 곧바로 나르본으로 돌아왔다. 로마군이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한다는 점의 중요성을 간파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초토화 전술(적이 활용하지 못하도록 자원과 생산 수단을 파괴하는 전술)을 동원해 로마군을 굶겨 눕히려 했다.

기원전 52년, 갈리아의 지도자와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에서 충돌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공성전을 끝까지 버텨냈고, 수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아에두이족 역시 갈리아 진영에 합류했다. 비브락테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위대한 카이사르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발판 삼아 갈리아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재확인받았다.

같은 해, 두 지도자는 다시 맞붙는다. 카이사르는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신이 후퇴하는 것으로 믿도록 꾸민다. 갈리아 지도자가 공격해 왔지만 로마군은 즉시 방향을 돌려 반격했다. 기습을 당한 베르킨게토릭스와 그의 병력은 알레시아의 요새 도시(오피둠)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이중 방어선을 구축해 그를 완전히 포위하고 갈리아 지원군의 접근까지 차단했다. 예비 병력과 무기가 바닥난 상태에서 굶주림에 지친 베르킨게토릭스는 결국 기원전 52년 9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년 후, 우셀로두눔의 반란(갈리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을 진압하는 등의 과정을 거친 카이사르는 영광에 싸인 채 갈리아를 떠났다.

결과와 영향

갈리아 정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그는 저서 『갈리아 전쟁기』에서 뛰어난 문필과 생생한 서술로 명성을 얻으며, 선전 목적으로 총사령관으로서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아울러 이 정복은 갈리아가 로마 세계에 가할 위협을 종식시켰고, 갈리아가 무역 발전의 전략적 요충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며 로마 제국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