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왕정복고(1814~1830): 루이 18세에서 샤를 10세까지

복고의 배경: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테러 정치를 종식시킨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이후, 프랑스는 총재정부라는 집단 지도 체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왕당파의 위협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약화되었고, 두 평의회 가운데 어느 쪽도 주도권을 잡지 못해 정치 마비 상태가 거듭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쿠데타에 절호의 기회였고, 시예예스와 탈레랑이 기획한 쿠데타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공화력 8년 브뤼메르 18~19일(1799년 11월)에 실행됩니다.

이후 보나파르트는 점차 집정정부를 확립해 나갔는데, 이는 곧 제1제국(1804~1814)으로 향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에게 전권을 부여했고, 1804년 12월 2일 스스로 황제의 관을 썼습니다. 통치 초기는 승슬장구했지만,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참패는 그의 권력 기반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이어진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유럽 열강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나폴레옹 1세(1769~1821)는 1814년 4월 6일 퇴위를 강요당해 엘바 섬으로 추방됩니다.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오랜 세월 고통받아 온 국민들은 왕정의 귀환을 환영했습니다.

왕정복고 시대 (1814~1830)

주요 인물

  • 루이 18세
  • 샤를 10세
  • 나폴레옹 1세

복고의 진행 과정

추방된 황제를 대신하여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1755~1824)가 1814년 권력을 장악하면서 복고(王政復古)가 시작되었고, 이 시기는 두 단계로 나뉩니다. 새 왕은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유산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국민에게 헌법 헌장을 부여하여 절대 군주제를 폐지하고 더욱 온건한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이 헌장은 평등,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출판의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또한 왕이 임명하는 귀족원과 선거로 구성되는 민의원이라는 두 개의 의회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 속에서 나폴레옹 1세는 엘바 섬을 탈출합니다. 1815년 3월 1일 골프주안에 상륙한 그는, 루이 18세가 겐트로 피신하는 동안 수도 파리로 귀환했습니다. 제국이 부활하면서 제1차 복고는 막을 내렸습니다. 열강 연합은 숙적에게 결집했고, 황제는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는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백일천하' 사건은 도망친 왕이라는 이미지를 남기며 루이 18세의 위상에 흠집을 냈고, 온건 왕당파, 초대왕당파(울트라), 제국 지지자들 사이의 긴장을 다시 고조시켰습니다. 루이 18세는 간신히 제2차 복고를 회복해 냈습니다.

그가 사망하자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1757~1836)이 왕위를 계승했고, 1825년에는 루이 18세가 폐지했던 대관식 의전을 다시 거행했습니다. 샤를 10세로 즉위한 그는 국민에게 부여되었던 권한을 신속히 축소하고 출판의 자유마저 정지시켰습니다. 이러한 울트라 왕당파의 권위주의 회귀는 1830년 7월 혁명, 이른바 '영광의 3일(Les Trois Glorieuses)'을 촉발했고, 그 결과 샤를 10세는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복고의 결과와 영향

왕정 복고는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고, 프랑스의 왕좌에 다시 왕권을 되돌려 놓았습니다. 1830년 7월 혁명은 복고 체제의 종언과 샤를 10세(1757~1836)의 추방으로 이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군주제 자체는 유지되었습니다. 이후 이어진 것은 루이필리프 도를레앙, 즉 루이필리프 1세(1773~1850)가 이끄는 이른바 7월 왕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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