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962년 샤론느 지하철 학살 사건: 프랑스 현대사에 남은 비극

배경: 알제리 전쟁과 프랑스 사회의 분열

1954년 알제리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진행되어 온 탈식민지화 운동을 앞두고,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프랑스 정부들은 뚜렷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1958년 드골이 집권에 복귀하며 알제리에 일정 수준의 자치를 제안했지만, 독립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군사적으로는 프랑스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 수 있었지만, 정치적 해결은 요원해 보였습니다. 알제리인들은 독립을 위해 활발히 운동을 전개했고, 프랑스 본토 여론 역시 독립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시위 참여, 가짜 신분증을 나르던 '서류 가방 운반자들', 그리고 사르트르 등 지식인들이 서명한 '121인 선언'이 그 증거입니다.

1961년 4월 알제리 쿠데타가 실패한 뒤, '프랑스령 알제리'를 고수하려는 세력은 비밀군조직(OAS)을 결성했습니다. 이 조직의 핵심 목표는 드골 정권 전복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의 투쟁이었으며, 테러 공격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OAS는 1961년 말부터 활동을 한층 강화했고, 1962년 2월 7일에는 하루에만 열 차례의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를 겨냥한 공격이었습니다.

1962년 2월 8일, 비극의 날

1962년 샤론느 지하철 학살 사건: 프랑스 현대사에 남은 비극

핵심 인물: 로제 프레(당시 프랑스 내무장관)

사건의 경위

프랑스공산당(PCF)과 통합사회주의당(PSU) 등 좌파 정당과 노동총연맹(CGT), 프랑스노동기독교연맹(CFTC) 등 노동조합은 OAS의 테러와 프랑스군의 알제리 작전에 항의하기 위해 2월 8일 저녁 시위를 촉구했습니다. 시위가 금지된 상황이었음에도 오후 6시 30분, 2,000명이 넘는 군중이 바스티유 광장에 모여 OAS의 행보를 규탄했고, 경찰과의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었습니다.

한 시간 뒤 주최 측이 해산을 선언했지만, 시위대 일부는 샤론느(Charonne) 지하철역 입구에서 경찰에 의해 진로가 막혔습니다. 인파가 밀려나면서 시위대가 쓰러졌고, 경찰이 던진 나무 격자에 맞아 최소 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가운데는 여성 3명과 15세 소년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상당수가 CGT 조합원이자 공산당 당원이었습니다.

결과와 영향

  •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1962년 2월 13일 거행되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프랑스 여론은 경찰 진압의 극단적인 폭력성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 학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놓고 거센 논란이 일었습니다. 내무장관 로제 프레는 처음에 시위 과정에서 CGT와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폭력적으로 행동했다고 비난했지만, OAS가 폭동을 유발하기 위해 시위 현장에 잠입해 교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서가 뒤늦게 확인되었습니다.
  • OAS는 사전에 공산당을 도발하려는 기도를 품고 있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샤론느 지하철 살인 사건 이후 좌파 단체들은 오히려 더욱 결속했으며, 1962년 2월 8일이라는 날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의 정치적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 상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