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혁명의 공포 위에 제국을 세웠고, 혁명적 이념을 위협으로 여긴 유럽 각국 왕실의 분노를 샀습니다. 프랑스 원정에서 황제가 패배하면서 제국은 1814년 막을 내렸고, 군주제가 복원되었습니다.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무시에(Monsieur)'로 불리던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폭발 직전의 상황을 물려받았으며, 입헌 헌장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구체제와 새로이 획득한 자유를 타협시키고자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절대군주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일천하(나폴레옹 통치의 마지막 시기) 동안 나폴레옹이 재등장하고 국왕이 망명하면서 왕권의 이미지는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루이 18세는 1815년 워털루 전투의 패배와 나폴레옹의 최종 추방 이후 왕정복고를 재건했지만, 망명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한편 아르투아 백작을 중심으로 한 초왕당파(울트라 왕당파)는 날로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서거하자 아르투아 백작이 권력을 잡고 샤를 10세로 즉위했습니다. 초왕당파의 수장이었던 그는 새로 얻은 자유들을 탄압했고, 이러한 억압은 결국 봉기를 촉발했습니다.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이어진 '영광의 사흘(Les Trois Glorieuses)'은 기존 권력을 전복시켰고, 샤를 10세는 8월 2일 퇴위한 뒤 강제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1830~1848

주요 인물
- 샤를 10세(Charles X)
-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
- 자크 라피트(Jacques Laffitte)
- 루이 필리프 1세로 알려진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Louis Philippe d'Orléans)
- 카지미르 페리에(Casimir Périer)
- 니콜라 장 드 디우 술트(Nicolas Jean-de-Dieu Soult)
-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전개 과정
아돌프 티에르가 소속된 대의원 회의소의 부름을 받아 샤를 10세의 사촌인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7월 왕정'이라 불린 이 입헌군주제는 온건한 정치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왕정복고기의 백기 대신 삼색기가 확정적으로 채택되었으며, 루이 필리프 1세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왕', 즀 모든 프랑스 국민의 왕이 되었습니다. 선거권의 기준이 되던 선거세(cens)도 낮아졌습니다. 이렇게 7월 왕정은 경제력을 갖추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층의 군주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사회 계층 간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반란의 기운이 고조되었습니다(리옹 카뉭 봉기, 트랑스노네 가 거리 학살 등). 1840년에는 아돌프 티에르가 이끄는 정부가 사임을 강요당했고, 술트 내각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국왕은 이후 카지미르 페리에, 자크 라피트, 프랑수아 기조 등 국민들이 보수적이라 여기는 정치인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실업이 늘며 임금이 하락하자 민심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공화파는 1847년부터 연좌 만찬 운동을 조직하여, 이 모임을 통해 선거세에 기반한 선거권을 폐지하고 보통선거권으로 대체하는 등 정치 체제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847년 수상(폴 의회 의장)이 된 기조는 1848년 2월 14일 예정된 만찬을 금지했습니다. 22일 군중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국왕이 기조를 해임했음에도 봉기는 세력을 키워 1848년 2월 혁명이라 불리는 본격적인 혁명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국왕은 1848년 2월 24일 퇴위하고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군주제의 막을 내렸습니다.
결과와 영향
7월 왕정의 몰락은 프랑스에서 군주 통치의 종언을 확정짓는 결과를 낳았으며, 제2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