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럼 해머'라 불린 압박 전술
훗날 '드럼 해머(drum hammer)'라는 인상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 전술은 적의 고지대 진지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부수는 방식이었다. 우선 15km 이상 거리에서 장거리 포격이 시작되었고, 이후 사정거리가 짧은 경포와 전차포, 참호에 숨은 보병의 소총·기관총·박격포 사격으로 탄막이 점점 가까워졌다.
뇌전 작전과 펀치 작전
1월 셋째 주 정찰 결과, 중공군이 한반도 중부 원주에서 진격을 멈춘 것으로 확인되었고, 서쪽 인천 인근에는 유엔군 전선 가까이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 집결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제한된 목표를 가진 첫 번째 공격인 '뇌전(Thunderbolt) 작전'이 1월 25일 개시되었다. 이 작전은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목표선은 한강까지였다. 2월 2일에는 부차적 공격인 '펀치(Punch) 작전'이 수원 북쪽 440고지를 향해 감행되어 4,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월 10일, '뇌전' 작전을 통해 유엔군은 한강에 도달하고 인천을 탈환하며 서울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라운드업 작전과 치열한 중부 전선
2월 5일에 이어진 '라운드업(Roundup) 작전'은 한반도 중부에서 유엔군 전선을 북상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투는 특히 격렬했다. 중공군은 횡성 북쪽에서 한국군 3개 사단을 궤멸시키고 유엔군 전선을 돌파했다. 횡성 서쪽 30km 지점인 지평리 일대에서는 프랑스 대대와 미 제2사단 소속 연대가 3일간 포위당했다. 좀 더 동쪽에서는 북한군이 제천 인근에 도달하면서 제10군단의 우익이 한동안 위협받았다. 이 공산군의 반격은 결연했으나 추진력이 부족했고, 6일 만에 끝났다.
킬러 작전, 유엔군의 우세 입증
2월 21일 시작된 '킬러(Killer) 작전'의 목표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9일 만에 한강 이남의 중공군 전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5주 후인 3월 1일, 유엔군 전선은 서쪽 김포부터 동쪽 강릉 인근까지, 38도선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위치에 고정되었다.
규칙적이지만 힘겨운 이 진격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서쪽에서 80km, 중부에서 20km, 동부에서 45km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유엔군은 중공군보다 우월함을 입증했고, 한국전쟁의 남은 기간 내내 이 우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을 위압해 왔던 '중국 초인(超人)'의 이미지도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리퍼 작전과 아이다호 선
3월 7일, 유엔군이 주도한 '리퍼(Ripper) 작전'은 한반도 동부와 중부에서 전개되었다. 기존과 같은 전술을 구사한 리퍼 작전은 3월 14~15일 서울을 재탈환했고, 3월 31일에는 '아이다호(Idaho)' 선이라 불리는 새로운 전선이 구축되었다. 이 전선의 중부 최북단 돌출부는 38도선에서 15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맥아더 해임과 러기드 작전
논란 속에 맥아더 장군이 해임된 4월, 유엔군의 압도적인 진격은 다시금 북서쪽으로 향했다. 4월 5일 시작된 '러기드(Rugged) 작전'을 통해 유엔군은 9일 만에 38도선을 넘어 '캔자스(Kansas)' 선에 자리 잡았다. 4월 19일에는 파생 전선인 '유타(Utah)' 선이 미 제1군단과 제9군단 병력에 의해 방어되었다. 4월 21일, 유엔군 제1전선은 서쪽 문산리부터 동해안 태포리 바로 북쪽까지 이어졌다.
'철의 삼각지대'를 향한 위협
유엔군이 점령한 진지들은 소위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로 불리는 요새화된 지역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곳은 중공군이 보급과 재편성을 수행하던 요충지로, 정점은 평강 부근에, 밑변은 서쪽 철원에서 동쪽 금화 사이에 걸쳐 있었다. 한국에서 저항의 핵심 거점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공세를 재개했다.
서울 함락(3월 14~15일) 이후 약 6주 동안 중공군은 전의가 낮아 보였고, 오히려 후퇴를 선호하는 듯했다. 4월이 되자 이것이 전략적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중공군은 적에게서 전략적 철수의 가치를 배웠고, 공격에 앞서 포격으로 적을 약화시키는 기술 역시 그들에게서 차용했다.
중공군 춘계 공세의 개시
4월 22일, 낮 동안 4시간에 걸쳐 집중적인 포격 준비 사격이 유엔군 진지에 쏟아졌다. 그리고 달이 떠오를 무렵, '철의 삼각지대' 안팎에 집결한 47만 5,000명의 공산군 병력이 중공군 춘계 공세의 첫 단계에 돌입했다. 유엔군은 이제 한국전쟁에서 가장 맹렬했던 중공군의 군사적 노력과 마주하게 되었다. 베이징과 평양은 적을 완전히 섬멸하고, 메이데이를 맞아 서울을 당시 소련을 이끌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바치겠다는 호전적인 선언으로 이 공세를 뒷받침했다.
임진강 돌파와 유엔 전선의 위기
며칠 동안은 이 선언들이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4월 23일 새벽, 박격포와 기관총의 엄호 아래 전진하는 중공군은 임진강을 도하하고 남쪽 철원~서울 도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유엔 전선은 중부에서 한국군 1개 사단이 부분적으로 궤멸당한 것을 제외하면 버텨냈고, 돌파구는 결국 봉쇄되었다. 그럼에도 중공군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4월 23일, 미군 역시 후퇴해야만 했으며, 한국군 또한 서울 방면 도로 이남으로 밀려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