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황금기의 절정과 민주주의의 성립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도시 국가로서 눈부신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경제·정치·문화 전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아테네는 주변 도시들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뻗쳤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와 델로스 동맹의 막대한 재원 덕분에 아테네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며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솔론의 개혁에 이어 클레이스테네스와 페리클레스가 개혁을 계승하면서 아테네는 본격적인 민주주의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전까지 귀족의 손에 쥐어져 있던 권력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시민 전체의 것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에클레시아(민회)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참석하고 정치 생활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인에게 폴리스(도시국가)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습니다. 시민권은 곧 도시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신분이었죠. 흥미롭게도 당시에는 어머니가 외국인이라도 아버지만 그리스 시민이면 자녀는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즉, 부계 혈통만이 시민권 취득의 조건이었던 셈입니다.
기원전 451년, 페리클레스의 시민권법 강화

핵심 인물: 페리클레스
그러나 기원전 451년, 정치 무대에 오른 페리클레스는 이 관행을 뒤집습니다. 그는 시민권 자격을 '그리스 시민 아버지'를 둔 사람으로 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테네 시민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으로까지 제한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이제 모계 혈통도 부계 혈통만큼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 법은 인구의 4분의 3 이상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여성, 외국인 거주자(메토이코이), 노예, 미성년 남성은 애초에 시민권이 없었으며, 모계 혈통이 그리스가 아닌 사람들은 기존의 시민권마저 박탈당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가
당시 아테네의 인구는 크게 늘어난 상태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시민권을 대폭 축소해야 할 시급성을 느꼈고, "시민의 수가 많아질수록 도시가 만장일치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진다"는 논리로 이를 정당화했습니다.
전략가(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페리클레스는 정치, 제도, 나아가 아테네 통치 전반을 확실히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시민권 접근을 크게 넓혔다면, 페리클레스는 도시를 더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제한 국면에 들어간 셈입니다. 결국 이는 정치적 비전과 효율성을 위한, 대중에게 호응받지 못한 선택이었습니다. 반면 이 제약으로 고통받는 일각에서는 "경쟁자를 숙청하기 위해 이 법을 통과시켰다"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개혁의 결과: 미스트호스(보수금) 제도의 도입
이 시기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정치의 실질적 지배자였습니다. 무려 15차례나 전략가로 선출될 만큼 도시에 대한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비전을 갖춘 그는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재정비했습니다.
특히 같은 시기(기원전 454년~450년경)에 그는 미스트호스(misthos) 제도를 선포했습니다. 이는 민회 참석 등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한 시민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이 금전적 보상을 통해 가장 가난한 시민들도 도시의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페리클레스의 통치는 양면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시민권의 문을 좁혀 배타성을 높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금 제도로 민주주의 참여의 실질적 평등을 강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