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폴레옹의 충신, 아브란테스 공작 앙도슈 주노의 영광과 몰락

앙도슈 주노(Andoche Junot)는 1771년 9월 24일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뷔시르그랑(Bussy-le-Grand)에서 태어나 1813년 7월 29일 몽바르(Montbard)에서 생을 마감한 프랑스 장군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가장 충실한 부관 중 한 명이었으나, 화려한 군공과 함께 극심한 낭비벽과 정신적 불안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나폴레옹의 충신, 아브란테스 공작 앙도슈 주노의 영광과 몰락
주노, 앙도슈, 아브란테스 공작 (Junot, Andoche, Duke of Abrantès)

보나파르트와의 운명적 만남

법학을 공부하던 주노는 1791년 9월 코트도르(Côte-d'Or) 의용병 부대에 입대했다. 필사적인 무모함으로 동료들에게 '폭풍우 주노(Junot la Tempête)'라는 별명을 들었던 그는 1792년 7월 하사로 승진했고, 이후 툴롱(Toulon) 공방전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젊은 보나파르트의 비서관으로 일하게 된다. 이 만남은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주노는 이후 평생 나폴레옹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측근으로 남았으며, 1795년 10월 5일 왕당파 반란 진압(방데미에르 13일) 이후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자 함께 승진과 영예를 누렸다.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에서의 전공

이탈리아 원정에서 보나파르트의 첫 번째 부관이 된 주노는 밀레시모(Millesimo), 로나토(Lonato), 베네치아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적에게서 노획한 군기를 파리의 총재정부에 전달하는 영예로운 임무를 수행했으며 대령으로 승진했다. 이집트 원정에도 참가하여 여단장이 되었고, 1799년 8월 8일 나자렛 전투에서는 단 500명의 병력으로 2만 5,000명에 달하는 튀르크 구원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대담한 전공을 세웠다. 아크레 공방전에서 보여준 이러한 기개는 그를 당대 최고의 용장 반열에 올려놓았다.

파리 총독, 실각, 그리고 재기

보나파르트는 이집트에서 홀로 귀국할 때 주노를 데려오지 못했지만, 자리가 잡히자마자 그를 불러들여 1800년 7월 27일 파리 총독으로 임명하고 1801년에는 사단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주노의 과격하고 방자한 행동은 보나파르트의 눈밖에 나게 되었고, 1804년 원수 명단에서 제외된 그는 1805년 3월 리스본 주재 대사로 좌천되었다. 그럼에도 주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대사직을 제쳐두고 전선으로 달려갔다. 한편 은행가 레카미에의 변호를 나섰다가—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살롱은 정부 반대파의 아지트였다—다시 실각하여 파르마의 반란 진압 임무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황제는 그를 다시 용서하여 1806년 7월 19일 파리 총독으로 재임명했다.

포르투갈 정복과 신트라 조약

그러나 주노의 사치와 낭비는 여전했고, 남편 못지않은 헤픈 돈쓰기와 서툰 술책에 능한 부인까지 겹치면서 그의 평판은 갈수록 나빠졌다. 결국 나폴레옹의 분노는 또 한 번의 좌천으로 이어졌다. 주노는 친영 성향이 짙은 포르투갈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07년 10월 스페인을 통과한 그는 11월 말 리스본에 입성했고, 브라질로 피신한 포르투갈 국왕이 남긴 땅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동시에 아브란테스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808년 8월,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웰즐리 경이 이끄는 1만 명의 영국군이 상륙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패배한 주노는 프랑스군의 본국 송환을 허용하는 신트라 협약을 체결했고, 이는 큰 논란을 낳았다.

몰락의 길과 비극적 최후

1809년 오스트리아 전역에 참전한 뒤 스페인 전선으로 복귀한 주노는, 마세나(Masséna) 휘하에서 1811년 1월 19일 리우마요르(Rio Mayor) 전투에서 이마에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이어진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그는 8월 19일 발루티나(Valoutina) 전투에서 개입하지 않는 결정적 실수를 저질러 러시아군이 궤멸적 타격을 모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휘권을 박탈당한 주노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이성마저 잃어갔다. 1813년 2월 20일 일리리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라구사(현 두브로브니크)의 무도회장에 훈장 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등장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거듭했다. 결국 고향 몽바르의 아버지 곁으로 돌려보내진 그는 창문에서 몸을 던져 요절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파리 에투알 개선문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