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를 가로막은 32km의 방벽
네덜란드 국토의 상당 부분은 해수면보다 낮다. 네덜란드인들이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축조해 온 것이 바로 물을 막는 댐과 제방이다. 그중 하나가 '아프슬라위트데이크(Afsluitdijk)', 즉 '최종 방벽'이라 불리는 거대 방파제다. 길이 32km에 달하는 이 댐은 바다를 가로막으며 프리슬란트 해안에서 시작되는데, 네덜란드군은 이곳에 코른베르더잔(Kornwerderzand) 요새를 구축해 두었다.
방파제 위에는 네덜란드 북동부와 암스테르담을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간다. 독일군이 노린 것은 바로 이 통로였다.
독일군의 침공과 펠트 장군
1940년 5월 10일, 강력한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그중에는 쿠르트 펠트(Kurt Feldt) 장군 휘하의 제1기병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수부대까지 동원해 소규모 네덜란드군에게 결정타를 가한 독일군은 암스테르담으로 신속히 진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펠트는 빠른 진격을 결심했다. 그러나 앞길에는 코른베르더잔이 병목으로 서 있었다. 이른바 '요새'는 17정의 기관총과 포(그중 3문만이 비교적 대형이었다)로 이루어진 방어선이었다. 수비대는 크리스티안 프란시스 요하니스 보에르스(Captain Christian Francis Ioannis Boers) 대위 휘하의 225명이었고, 7.92mm 기관총 21정과 50mm 포 4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장 큰 세 개의 방어 시설은 두께 3m의 철근콘크리트 벽으로 보호되어 210mm 포탄의 직격도 견딜 수 있었다.
첫 교전
침공이 시작되자 보에르스는 두 개 소대(70명)를 요새 앞쪽에 경비대로 배치했다. 그러나 이 두 소대는 독일 항공기의 공습을 받고 주 저항 진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병사 1명과 민간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즉시 공격을 이어가지 않았다. 펠트는 더 강력한 항공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고, 그 지원은 5월 12일에 도착했다. 다만 5월 11일 저녁, 펠트는 네덜란드군이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찰대를 내보냈다가 갑작스러운 사격에 2명을 잃었다. 네덜란드군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독일군의 공세
5월 12일 아침, 독일 항공기 62대가 방어 시설들을 공격했다. 곧이어 독일군의 곡사포와 88mm 포가 포격을 시작했다. 격렬한 폭격 후 독일 보병 500명이 진격했지만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펠트는 알지 못했다. 5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보에르스의 부대가 20mm 대공포 3문과 대공 기관총 4정으로 증강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13일 아침 독일군이 다시 공격했을 때, 네덜란드군이 독일 항공기들에게 사격을 개시하자 놀란 것은 조종사들보다 펠트였다. 루프트바페(독일 공군)는 다섯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그중 네 번이 격추당했다. 이어 한 시간 동안 무겁지만 효과 없는 포격이 이어졌고, 곧바로 독일 돌격대가 공격에 나섰다.
네덜란드군은 적이 800m까지 접근한 뒤에야 기관총 사격을 개시해 방어 시설 앞 도랑에 적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두었다. 독일병 누구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밤이 되자 보에르스는 부하들에게 일정한 간격으로 조명탄을 발사하게 하여 독일군의 기습을 차단했다.
함포의 등장
5월 14일 아침, 독일군은 포병으로 새로운 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보에르스에게는 답이 있었다. 전날 저녁 그는 HNLMS 포함 '요한 마우리츠 판 나사우(Johan Maurits van Nassau)'호에 증원을 요청해 두었다. 150mm 함포 3문을 갖춘 이 네덜란드 군함은 18km 거리에서 독일군 포진지를 포격했다. 전화로 유도된 네덜란드군의 사격은 극도로 정확했고, 독일군의 포문은 잠잠해졌다. 두 번째 경악을 겪은 펠트는 공격 중지를 명령했다.
쓰라린 항복 명령
그러나 지금까지 패배를 모르던 보에르스와 그의 부하들은 다음 날 쓰라린 명령을 받았다. 루프트바페의 불필요하고 잔혹한 로테르담 폭격 이후 네덜란드군이 항복한 것이다. 보에르스는 영웅적으로 싸운 부하들을 치하하고 명령에 따랐다. 전투는 끝났다. 네덜란드군의 손실은 단 한 명의 병사였다. 반면 독일군은 늘 그렇듯 작은 손실만 인정하여 이 전투에서 전사 5명, 부상 25명을 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민간인 목격자들은 독일군의 막대한 손실과 "시체로 가득 찬 참호"를 증언했다. 한편 '요한 마우리츠 판 나사우'호는 영국으로 탈출하려다 침몰했고, 승무원 17명이 전사했다.
크리스티안 프란시스 요하니스 보에르스 대위
네덜란드 방어를 이끈 보에르스 대위는 1889년생으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진정한 용사였다. 항복 직후 그는 즉시 참전 용사들이 만든 저항 조직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 조직을 잠식하는 데 성공했고, 조직원 대부분은 1941년 봄과 여름에 체포되었다.
보에르스는 마침내 자우젠하우젠 수용소에 끌려가 '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부하들은 그를 '천생 지도자', 탁월한 직업군인이라고 평했다. 네덜란드 해방 후 그의 조국은 그에게 추서 훈장을 수여했다. 오늘날 전장에는 그의 기념비가 서 있으며, 2005년에는 현지의 고가교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관련 기념식에는 보에르스의 아들과 손자가 참석했다.

보에르스 대위.

네덜란드 포함 '요한 마우리츠 판 나사우'호.
글: 판텔리스 D. 카리카스(Pantelis D. Karyk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