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8년 4월 타히티에 도착하는 부건빌 함대를 그린 판화 • WIKIMEDIA COMMONS
파리 샤틀레의 공증인 막내아들로 태어난 루이앙투안 드 부건빌(Louis-Antoine de Bougainville)이 장거리 항해선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벌써 27세가 되던 해였다. 1756년, 그는 라 리콘른(La Licorne)호를 타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하며 캐나다 전쟁의 부관으로 부임한다. 노련한 선원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두뇌를 지닌 그는 천문학과 항해 기구부터 식량과 위생 문제까지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1761년 루이 15세가 캐나다를 영국에 넘겨주기로 결정하면서 그의 군인 인생은 중단되고 만다.
포클랜드 제도 원정
그러나 부건빌은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략선 선장 니콜라-피에르 뒤클로-기요(Nicolas-Pierre Duclos-Guyot)와 함께, 캐나다에서 쫓겨난 아카디안들을 남미 연안 근처의 포클랜드 제도에 정착시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슈아젤 외무장관은 이 구상에 열광했지만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결국 부건빌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생말로 조선소에서 배 두 척을 건조하기로 한다. 설리(Sulky)호는 빠른 플루트선이지만 많은 물자를 실을 수 없었고, 따라서 덜 우아하고 훨씬 둔한 레투왈(L'Étoile)호가 이를 따라야 했다. 함대는 언제나 이 떠다니는 창고를 기다려야만 했다.
원정대는 1763년 답사를 위해 출항했다. 그러나 영국도 스페인도 이 사업의 성공을 바라지 않았고, 1764년 루이 15세는 작은 군도를 사촌인 스페인 국왕, 즉 자신과 같은 부르봉 가문에게 넘겨준다.
보상으로 부건빌은 스페인 왕실에서 거액을 받았고, 동시에 그의 놀라운 모험의 시작이 될 임무를 맡게 된다. 포클랜드 반환 후 태평양 항로로 프랑스로 돌아오는 것, 즉 프랑스인 최초로 세계일주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듯 그는 세 명의 학자를 선상에 태운 최초의 탐험가이기도 했다. 천문학자 피에르-앙투안 페롱, 지도 제작자 샤를 루티에 드 로맹빌, 박물학자 필리베르 코메르송이 바로 그들이다.
과일과 수줍지 않은 여인들
1768년 1월 마젤란 해협을 빠져나와 태평양으로 접근하던 탐험가는 17세기 포르투갈인 키로스가 목격했다는 미지의 땅을 찾고 있었다. 먼저 영국 해적 데이비스가 목격했다는 커다란 섬, 아마도 이스터섬일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지만, 남쪽으로 항로를 튼 결과 실제로는 타히티 제도로 향하게 된다. 4월, 주민들의 환영을 받은 선원들은 '새로운 키테라'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풍성한 과일과 수줍음 없는 여인들은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타히티 주민들은 갈수록 많은 선물을 요구했고, 부건빌은 자신들보다 먼저 지나간 배가 주민들에게 대량의 물건을 나눠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9일 후 상황이 험악해지면서 배들은 섬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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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는 이 낯선 나라와 이방인들의 아내들이 궁금하다는 한 타히티 청년이 동승한다. 아우투루(Ahutoru)는 유럽에 도착한 최초의 폴리네시아인이 된다. 다른 선원들보다 눈치가 빠른 그는 코메르송의 하인이 사실은 여성, 즉 세계일주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 장느 바레(Jeanne Barret)임을 알아차린다. 처음의 놀람이 가라앉은 뒤, 선원 전원은 장느가 여행 내내 완벽하게 행동해 왔다는 데 동의했고 그녀는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곧 더위는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고, 바람은 부족하며, 선원들 사이에서 성병이 번진다. 주민들이 매우 공격적인 섬들도 통과해야 했다. 두 달 후 함대는 네덜란드령 보르네오 섬에 도착한다. 선원들은 굶주리고 목마랐으며 옷은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네덜란드의 독점 수호
부건빌은 여행 중 향료 식물을 수집해 일 드 프랑스와 일 드 부르봉(현재의 모리셔스와 레위니옹 섬)에 옮겨 심어, 이 귀한 생산물을 그곳에서 번성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식물 구매를 막고, 선적을 검사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독점권을 잃지 않으려고 자라는 향료를 그대로 불태워 버렸다. 결국 부건빌은 빈손으로 일 드 프랑스로 향했고, 1768년 11월 두 척의 배에 필요한 수리를 진행한다.
바로 같은 시기, 작가 베르냉 드 생피에르(Bernardin de Saint-Pierre)가 마스카렌 제도에 도착한다. 그러나 함장은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타히티에서 자신보다 8개월 앞선 영국 배의 정체를 파악한다. 스왈로(Swallow)호와의 격차가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부건빌은 타히티 낙원의 존재를 가장 먼저 유럽에 알리기 위해 경주에 나선다. 설리호는 1769년 3월 16일 생말로에 도착했고, 스왈로호는 3월 20일 영국에, 레투왈호는 4월 24일에야 로슈포르에 닿는다. 도착 사흘 뒤 부건빌은 아우투루와 함께 베르사유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그의 후원자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죽고 뒤 바리 부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고귀한 야만인'을 고향에서 뿌리째 뽑아왔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함장은 후견인의 귀국 여비를 직접 마련해 주는데, 아우투루는 돌아오는 길에 천연두로 목숨을 잃는다.
헛된 세계일주였나?
1771년 세계일주기(Voyage autour du monde)를 출간하지만, 부건빌의 전성기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프랑스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 무익한 세계일주를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왕실 재정을 되살렸을 향료조차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51세가 되던 1781년에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그는 미국 전쟁에 참전하고 혁명기를 기적으로 통과하는데,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 그를 구해준다. 이후 경도국(Bureau des longitudes)에 들어가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 준비에 참여했고, 황제가 된 보나파르트는 그를 제국 백작으로 임명한다. 1811년 루이-앙투안 드 부건빌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해는 판테온에 안치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은 무엇보다 자연학자들이 부겐빌레아라고 명명한 브라질 식물에 새겨져 남아 있다.
더 읽을거리
• 부건빌(Bougainville), D. 르 브륀, Tallandier, 2019
• 부건빌 여행기 부록(Supplément au voyage de Bougainville), D. 디드로, Pocket, 2019
부건빌 여행기 부록
1779년 디드로가 집필한 이 책은 1771년 부건빌이 출간한 세계일주기에 대한 철학자의 응답이다. 디드로는 유머러스하게 이 항해자를 '정적인 삶과 쾌락에서 활동적이고 고통스럽고 소모적이며 방탕한 여행자의 직업으로 넘어간,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무엇보다 이 계몽주의 철학자는 유럽인의 삶과 비교해 타히티인들의 자연스러운 삶을 찬양한다. 항해자들이 '고결한 야만인'들에게 탐욕과 절도, 한마디로 악을 가르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작가는 이를 빌려 기독교 종교와 프랑스 왕국의 사회 질서를 비판할 기회로 삼는다. 이 책은 혁명기인 1796년에야 사후 출간되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던 부건빌이 그것을 읽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