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안누알 참사 이후, 케르트 재정복(1921)

안누알 참사 이후, 케르트 재정복(1921)

그날 아침, 1년 전 외인부대(테르시오 데 엑스트라녜로스)를 창설한 밀란 아스트라이 중령은 서부 전선의 타자루트 공략 작전에 투입되어 로크바고잘에서 자신이 새롭게 만든 부대의 군기 3개와 함께 위치해 있었다. 그는 알바레스 델 만자노 장군으로부터 별다른 설명 없이 테투안 인근 폰닥 데 아인 예디다로 군기 하나를 신속히 파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추첨 결과 제1군기를 지휘하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소령이 선발되었고, 그는 즉시 군단의 용맹함을 상징하는 위업을 시작한다. 무기와 장비를 모두 갖춘 대대가 이틀도 안 되는 시간에 100킬로미터 이상을 강행군한 끝에 23일 세우타에서 '시우다드 데 카디스'호에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로 그날, 동부 전선의 스페인군은 이미 완전히 붕괴된 뒤였다.

7월 25일, 두 개의 테르시오 군기와 레귤라레스(토착 정규군) 타보르 두 개 부대가 멜리야 항에 도착하자 공포에 떨던 주민들은 환호로 맞이했다. 하루 전에는 왕관 연대의 대대와 최고판무관 본인이 이 요새 도시에 입성한 바 있었다. 증원 부대가 도착할 때마다 거리 행진을 시킨 것은 적이 문앞까지 온 상황에서 주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중한 성격의 베렝게르에게는 아무리 증원이 도착해도 충분하지도, 준비되지 않았다고 여겨졌다. 8월 6일 멜리야 주둔 고위 지휘부와의 회의에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몬테 아루이트를 구원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시도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그곳에서 안누알 패잔병들과 함께 갇혀 있던 나바로 장군에게는 포위군과 항복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권한이 허용되었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8월 9일, 합의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고 진지가 인계되자마자 하르크 병사들은 수비대 전원을 학살했다. 일부 장교들을 인질로 잡은 것만이 예외였다.

정부의 위기와 반격의 준비

안누알 참사의 여파로 아옌데살라라르 내각은 총사퇴했고, 8월 14일 마우라를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가 출범했다. 신정부는 베렝게르를 최고판무관직에 유임시키면서 재정복 계획을 제시했다. 다음 날부터 강력한 적의 저항 속에서도 멜리야 주변의 여러 거점과 블록하우스(소형 요새) 점령 작업이 시작되었다. 한편 9월 초, 하르크 병사들은 구루구 산에서 멜리야 시내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포탄이 남긴 물질적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당시 도시에 있던 35,000명이 넘는 병사와 민간인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그래서 첫 공세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이 산을 포위하고 점령하는 것이 되었다.

9월 12일, 해군과 공군의 강력한 포격 준비에 이어 카바네야스 장군의 부대가 소코 엘 아르바아를 점령하며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르카는 나도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구루구 산 동쪽 통로에 병력을 집중시키며 맞섰다. 9월 15일에는 '나쁜 놈(The Bad One)'이라는 별명을 가진 다트 하메트 요새가 파괴되었는데, 이때 15명의 자원 입대 군단병들이 동료를 구하러 달려갔다. 자신의 목숨을 치러줄 각오로 임한 이 행동은 테르시오 특유의 죽음 숭배, 그리고 병사들 사이에 끓어오른 복수심을 잘 보여준다. 멜리야 적십자회장으로서 장병들을 위해 헌신한 빅토리아 공작부인에게 병사들이 보낸 선물이 그 증거였다. 두 개의 하르크 병사 목이 붉은 장미 바구니에 둘러싸여 전달된 것이다.

드디어 9월 17일, 카바네야스·산후르호·페데리코 베렝게르(최고판무관의 동생) 세 장군이 이끄는 20,000명 규모의 세 개 종대가 포병과 항공 지원을 받으며 나도르를 점령했고, 원주민 마을에 대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9월 26일에는 구루구 산 북쪽, 멜리야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서쪽 통로를 지키던 티사 거점으로 보급 수송대가 도달하지 못했고, 이틀 뒤 재시도마저 실패했다. 이 상황은 새로 부임한 멜리야 총사령관 카발칸티 장군이 위험을 무릅쓴 작전으로 수습했다. 1909년 유명한 닥스더트 돌격으로 받은 첫 훈장에 이어 두 번째 로레아다 훈장 후보 지명이라는 영예를 안았지만, 보급 작전에 사령관이 직접 최전선에 나선다는 점에서 실베스트레식 돌진이라며 거센 비판에도 부딪혔다. 이 국면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투에로 장군과 시르벤트·라카날 양 대령은 파면되었고, 이는 국방준타들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왔다. 안누알 이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반란군에게도, 무능한 장교에게도 더는 어떠한 배려도 없었다.

한편 스페인 정부는 항공기와 전차, 심지어 담배까지 구매하기 위해 모금과 자선 행사를 벌이며 지원에 나선 국민들의 연대 반응을 보고, 또다시 '비극의 주간'이 반복될까 두려워하던 기존의 우려가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인적·물적 증원을 두고 흥정을 벌이던 저열한 정책은 수정되었고, 이제 지원은 아낌없이 쏟아졌다. 마침내 입대자가 돈을 내면 최전선 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던 '쿼타(quota)' 면제금 제도도 폐지되었다.

결정적 전환점

10월 2일, 다시금 견고하게 요새화된 세브트를 카바네야스·산후르호·페데리코 베렝게르의 부대가 함락한 것은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압드 엘 크림은 9월 1일 해당 지역 카빌족의 복속을 받아내며 케르트 강을 건너 이곳에 머물고 있었으나, 이 패배와 함께 구루구 산 남쪽 사면의 세강간과 아틀란텐까지 상실하자 말을 타고 황급히 도주했다. 스페인군 항공기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기도 했다. 마침내 10월 10일, 구루구 산 정상에는 스페인 국기가 게양되었고 멜리야 주민들은 크게 안도했다.

10월 14일에는 활주로와 젤루안의 알카사바(성채)가 함락되어 1909년의 방어선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라 이나'라는 집에서 단테의 지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잔혹하게 고문된 스페인 민간인과 군인 수십 명의 썩어가는 시신이 널려 있었고, 일부는 벽에 못 박혀 있었다. 특히 등을 맞댄 채 묶여 산 채로 불태워진 카라스코 대위와 페르난데스 중위의 시신이 처참함을 더했다.

케르트의 공포

이제 목표는 1913년 방어선에 도달해 케르트 강에 이르는 것, 즉 안누알 철수의 현장을 되찾는 것이었다. 10월 24일 부대는 몬테 아루이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병사들은 다시 한번 지옥을 마주했다. 매장되지 않은 채 반쯤 미라가 된 시신 3,000구, 그중 다수는 목이 잘리거나 내장이 적출되거나 돌에 맞아 숨을 거둔 참상이었다. 하르크 병사들은 심지어 이미 죽은 이들을 파내는 데까지 공을 들였다. 케르트로 이어지는 길을 다시 걸을 때 병사들은 알칸타라 기병연대의 잔해와도 마주쳤다. 3개월 전 나바로 장군 종대의 철수를 엄호하다 전멸한 이간 강변에, 사람과 말의 시신이 유령처럼 뒤엉킨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11월 11일 야자넨과 티파소르의 함락은 압드 엘 크림에게 중부 리프로의 후퇴를 강요했다. 11월 21일 산후르호 장군의 부대가 라스 메두아를 점령했고, 12월 1일에는 케르트 강변의 카두르에 도달했다. 12월 21일 바텔과 티스투틴을 점령한 스페인군은 다음 날 다시 케르트 강을 건넜는데, 이때 멜리야 비행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종대 저공비행을 펼치며 지상 부대를 엄호했다. 이어진 기습 작전에서 카바네야스 장군은 1922년 1월 10일 케르트 강 너머의 다르 드리우스에 진입했다.

그 앞에는 험준한 리프의 산악 지형이 위협적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수평으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이미 실베스트레 장군을 삼켜버린 정복 불가능의 땅이었다. 1922년 7월 15일, 피카소 장군이 진행한 참사에 대한 철저한 조사로 이미 풍파의 한복판에 서 있던 베렝게르는 최고판무관직에서 물러나고 리카르도 부르게테 장군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보호령에서 격동하고 유혈이 낭자하던 한 시대가 저물며, 또 다른 격랑의 시대가 열렸다. 그 시대는 1925년 9월 8일 알후세마스만에서 펼쳐진 역사상 최초의 해륙합동 상륙작전으로 이어졌고, 이로써 압드 엘 크림의 이른바 '리프 공화국'은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참고문헌

  • 훌리오 알비 데 라 쿠에스타, 『안누알을 둘러싸고(Around Annual)』, 스페인 국방부 출판, 2016.
  • 후안 판도 데스피에르토, 『안누알의 비밀사(Secret History of Annual)』, 테마스 데 호이, 1999.
  • 살바도르 폰텐라 발레스타, 『모로코 전쟁(The Moroccan War)』, 라 에스페라 데 리브로스, 2017.
  • 마리아 로사 데 마다리아가, 『이리의 협곡에서(In the Ravine of the Wolf)』, 알리안사 출판사, 2005.
  • 『데스페르타 페로 현대사』 잡지, "안누알의 참사", 제30호, 2018년 11~12월호.

이 글은 제1회 데스페르타 페로 역사 소논문 공모전 출품작입니다. 글에 담긴 자료 조사, 사실 관계 및 독창성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