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알제리 전쟁의 종결, 1962년 독립과 에비앙 협정

알제리 전쟁의 종결, 1962년 독립과 에비앙 협정

1962년 7월 3일, 알제리 독립 선포 직후 환호하는 군중의 모습 • BRIDGEMAN IMAGES

1954년부터 8년간 이어져 온 알제리 전쟁의 종식을 위한 교전 당사자 간 협상은 1961년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다. 마침내 1962년 3월 18일, 프랑스 정부 대표단과 알제리 공화국 잠정정부(GPRA) 대표단은 프랑스 에비앙에서 협정에 서명했고, 이로써 3월 19일 정오를 기점으로 모든 적대 행위가 종료될 것임이 공식 발표되었다.

휴전 이후에도 남은 폭력

그러나 현실은 협정만큼 평온하지 않았다. 휴전 이후에도 극우 비밀결사조직 OAS(Organisation armée secrète)가 주도하는 테러와 공격이 계속되었고, 알제리 잠정정부 역시 하르키(harkis) 등 프랑스 측에 협력했던 전투원들에 대한 숙청을 진행했다. 프랑스 본토 출신 주민과 피에 누아르(pieds-noirs, 알제리 거주 유럽계 주민)들이 납치되거나 암살되는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19일은 오늘날까지 상징적인 날로 기억된다. 프랑스는 이 협정을 통해 알제리의 독립을 공식 승인했다. 알제리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에게 별도의 최종적 지위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지를 보유한 사하라 지역의 알제리 편입도 받아들였다.

양측 서명국은 또한 휴전 이후 발생한 일체의 법적 소추를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어느 한쪽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상호 사면만이 진정한 평화 회복의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쪽도 자국이 명령하거나 방조한 범죄 행위를 스스로 처벌할 의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어진 협력

에비앙 협정은 독립 찬반을 묻는 알제리 국민투표 실시을 골자로 담고 있었다. 투표가 치러지기 전까지 프랑스 고등판무관이 알제리 잠정행정부와 공존하는 과도기 체제가 운영되었다. 1962년 7월 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독립 찬성은 99.72%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확정되었다.

이 결과는 미래 국가의 완전한 주권을 선포하는 동시에, 특히 알제리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폭력 사태가 계속되면서 결국 백만 명에 달하는 피에 누아르들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본토로 향했다. 아울러 협정은 양국 간 경제·재정·문화·기술 협력의 원칙도 확립했다.

프랑스가 확보한 특혜

이러한 협력 원칙 덕분에 프랑스는 1965년까지 알제리 영내에 8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었고, 메르엘케비르(Mers el-Kébir)와 부스페르(Bou Sfer) 해군 기지를 15년간, 그리고 사하라의 로켓 시험장과 원자폭탄 실험 시설을 5년간 사용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만약 양국 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여 해결하기로도 합의했다.

한편 이 협정들은 프랑스 극우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같은 해 8월 22일, 드골 대통령은 파리 교외 프티클라마르(Petit-Clamart)에서 벌어진 저격 사건의 표적이 되었으나, 다행히 이 암살 시도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